밑 빠진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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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덥습니다. 저란 사람은 다른 것엔 둔감하면서 유난히 날씨에는 민감합니다. 겨울엔 겨울대로 여름엔 여름대로, 춥다고 덥다고 법석을 떱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환경이 변해도 법석의 강도는 늘 그 정도라는 것입니다. 영하 십 몇 도까지 내려가며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던 한국의 겨울만 되면 추워 죽겠다고 난리였는데, 고작 이곳 캘리포니아 추위에도 딱 그만큼 저는 유난을 떱니다. 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덥지근한 한국의 여름을 하도 지긋지긋해 했던 지라 100도를 쉽게 넘나든다는 캘리포니아 살인 땡볕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또 딱 그만큼만 지긋지긋해 하며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깥과 상관없이 내 안에서 느끼는 정도는 항상 늘 그만큼입니다. 제 안에 충격을 완화시키는 뭔가가 한 꺼풀 깔려 있는 건지, 아니면 아주 특별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제 속에만 들어가면 ‘아주’에 해당하는 것만큼만 밑으로 쏘옥 새 버리는 특별한 구멍 말입니다.
구멍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깁니다만, 얼마 전에 ‘달마야 놀자’ 라는 한국 영화를 봤습니다. 오래 전에 친구가 추천한 영화였는데 지금에야 보게 된 겁니다. 거기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깡패들이 일을 저지르고 절간으로 피신을 옵니다. 명색이 깡패 건달인지라, 하라는 일은 안하고 허구한 날 깽판만 놓고 있으니 절간에 있는 스님들이 죽을 맛이죠. 해서 내기를 하게 됩니다. 깡패들이 내기에서 지면 두말 없이 절을 떠나준다는 조건 하에. 거듭되는 내기로도 결판이 나지 않자 결국 왕 스님의 주도 하에 비장의 내기가 시작됩니다. 다름 아닌 ‘밑 빠진 독에 물 채우기’.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결국 항아리를 그냥 통째로 연못 속에 풍덩 던져 넣은 깡패팀이 이깁니다. 단순함에 진리가 있다고, 인간적인 모든 노력과 갖가지 방법론을 뒤로 한 무식한 깡패팀의 승리입니다. 항아리의 원래 기능과 쓸모를 과감히 내던져 버린 것이죠. 그냥 물의 일부분이 되게 한 겁니다.
그 영화를 보고 있자니 과거의 제가 생각났습니다. 밑 빠진 독과 같았던 제 자신 말입니다.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제 안에 있었거든요. 그 구멍에서 휑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만 무력감에 빠져 그 구멍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구멍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처럼, 상식의 선, 관습의 틀, 고정관념의 벽을 훌쩍 뛰어 넘어야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더군요.
영화 속 무심하게 던진 노스님의 대사가 제 마음에 톡 떨어져 가라 앉아 있습니다. 왜 자신들을 계속 감싸주냐는 깡패들의 질문에, “깨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맘 속에 던진거야…” 라고 답하던 그 노스님의 말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던지면 채워집니다. 더 이상 복잡해지지 않기로 작정하고 제 모든걸 절대자의 품 안에 던졌을 때 비로소 저는 채워졌습니다. 아니, 실은 그 분이 진작에 금이 가고 깨진 저를 당신 품 안에 던져 넣으신 것일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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