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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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붙여 두고, 오며 가며 들여다 보는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채송화와 원추리, 봉숭아가 곱게 피어있는 꽃밭과 장독대 사이에 서서, 머리를 하나로 묶어 넘긴 시원한 이마에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담긴 빛바랜 사진입니다. 그 촌티나는 사진이 저는 참 좋습니다. 흙 냄새 폴폴나는 내 어릴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충남 아산군 신휴리. 우편 배달용 주소보다는 ‘벙굴’로 불렸던 내 고향 마을. 그 정경은 동네입구에 있던 구멍가게에서부터 골목 골목을 다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아직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논두렁을 지나 저수지를 끼고 난 학교 가는 길은 내 단짝 친구였던 정미와 함께 무우를 서리해 먹으며 다녔던 길입니다. 그리고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며 비상이 걸린 어느날엔가는 한 동네 사는 학교 언니, 오빠들과 함께 두 줄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걷던 길입니다. 그 옛 길에 담긴 추억가운데 혼자 울며 걸었던 날이 제겐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일입니다. 뒤가 급한데 담임선생님은 교실을 비우고 안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저는 큰,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조차 그 황당한 사고를 정리해주지 못하고 저를 서둘러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무거운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엉거주춤 걷는데, 집으로 가는 길은 왜 그렇게 멀던지요. 마을 입구 구멍가게 앞을 지날 땐, 주인 아주머니가 눈치챌까봐 뛰었는데, 뒤에서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쌓였던 긴장이 풀리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왜 이 냄새나는 것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그 먼길을 끌고 왔냐며, 저를 씻으며 속상해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야학 교사 시절, 입만 열면 똥 얘기, 방귀얘기로 좌중을 웃기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는 훗날 아내와 함께 놀이방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특기를 여지없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풀어 놓고 있었습니다. 놀이방에 처음와서 쭈뼛쭈뼛 겉돌며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선배는 똥 시리즈, 방귀 시리즈를 푼답니다. 똑같은 얘기를 해도 그때마다 아이들은 모두 까르르 웃으며 쓰러진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그의 원초적인 얘기 앞에 마음을 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선배의 향기로운 이야기에는 나름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내기인 남편은 저의 흙 냄새나는 어린시절 추억담을 늘 졸라대곤 합니다. 그 통에 저는 30년 넘게 비밀에 부쳐왔던 향기로운(?) 사고를 털어놓고 말았습니다.비밀이 하나 무너지면서 남편과 저 사이에 놓인 마음의 허물도 하나 무너졌습니다. 대신 저는 ‘똥싸배기’ 라는 별명을 하나 얻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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