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꼭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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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의 작은 벽촌에서 자라던 나는 5학년 2학기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짤막한 단발머리에 촌티가 주렁주렁 나는 어설픈 모습으로 서울의 여중생이 되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실없는 웃음은 어찌 그리 나오던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 좋아 눈만 뜨면 ‘늦었다’며 턱없이 이르게 학교엘 갔다. 텅 빈 교정이나 한적한 교실을 내것인양 즐기곤 했다. 그 헐렁헐렁한 편안함을.
그 시절에 만났다. 어디 한구석 나와는 닮은 데라고는 없는 내 친구를. 우수에 젖은 듯한 크고 애잔한 눈에 백옥같이 희고 고운 피부, 그기에 날씬하고 큰 키. 눈에 띄게 예쁘기만 할 뿐 아니라 성적마저 우수하여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 아이를. 학교 도서관에서 우린 만났고 교과서 대신에 소설만 읽어대던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를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호떡집이나 국화빵집 아니면 한적한 ‘비원’의 연못가에 앉아서 헤세의 구름을, 데미안의 깨뜨리고 나와야 할 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해도 못할 단어들로 채워진 ‘시’라는 것을 쓴다고 가까운 섬들도 찾아 다녔고 음악다방이라는 곳에 쑤셔 박혀 하루를 보내곤 하며 대학을 마치고 연애라는 것 까지도 비슷한 시기에 했다.
순탄한 열애를 한 나도, 우여곡절이 하 많기도 했던 그 친구도 결국엔 만나던 그 사람과 각각 결혼을 했다. 일찌감치 아이 셋을 낳고 살긴 했지만 늘 불안하고 안스런 모습으로 날 보러와 내 마음 속 깊은 아픔이었던 친구가 미국이란 곳으로 가야만 하는 날 보러 온 것이었다. 친구의 등에 업힌 아이는 감기로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을 비비고 옆에 세운 아이는 포대기 끈을 질근질근 씹는데 얼굴이 초췌한 친구의 손엔 타국에서 아프면 안 되니 남편 끓여 주라며 인삼뿌리 한 박스가 들려 있었다. 눈물 속에 말을 묻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움을 빽빽이 쓴 파란 항공엽서는 되돌아오기만 했고 친구의 소식은 그 후로 알 길이 없게 되었다. 10년의 세월 후, 한국을 찾아 동사무소를 네 군데나 거쳐 찾아간 집엔 내 가슴을 뻥 뚫는 폭탄 같은 현실이 버티고 있었다. 아들 둘은 놓아두고 딸 하나만의 손을 잡고 종적을 감춘 친구대신 내게도 낯익은 친구의 시모 집엔 새로 맞은 새 며느리의 갓 난 손자의 기저귀가 걸려 있었다. 좁은 현관에 세워진 두 대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고등학생이 된 두 아들마저 못보고 돌아 나오다 세 단 뿐인 현관 계단에서 나는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볼 수 없는 그리움으로 시리도록 가슴이 얹히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 ‘그래도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만남만은 꼭 허락해 주십시오’. 보고싶어 날 울리는 친구야 우리 이 생에선 못 만나더라도 천국문에서 만은 꼬-옥 만나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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