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크루즈의 출세작인 ‘탑건’에 20여년 앞서 한국에서 ‘빨간 마후라’가 히트했다. 둘 다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신상옥이 감독하고 최무룡, 신영균, 최은희가 주연한 ‘빨간 마후라’는 당시(1964년)엔 대단한 스펙터클 영화였고, 블루 벨스 4중창단이 부른 행진곡풍의 주제가는 코흘리개들도 부를 만큼 유행했다.
그 무렵 절정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 곽규석도 공군출신으로 애칭이 ‘후라이보이’였다. ‘마후라’는 ‘머플러(muffler)’의 한국식 발음이다. 미국인들에겐 ‘스카프’라고 해야 더 잘 통한다. 머플러라면 자동차 꽁무니에 붙은 배기 소음 억제장치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후라이보이’도 ‘플라이보이’(flyboy, 공군병사)라고 해야 원음에 더 가깝다.
빨간 머플러가 한국공군의 전유물이 된 연유는 분명치 않다. 대공포를 맞고 적진에 떨어진 조종사를 구조할 때 쉽게 분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단순히 한 멋쟁이 공군장교의 패션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한국공군은 지난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하고 앙드레 김이 비단으로 디자인한 ‘빨간 마후라’를 모든 탑건에게 배포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요즘엔 ‘빨간 마후라’라는 말이 탑건들의 자랑스런 목도리나 한국공군의 용맹을 그린 60년대 신상옥 영화 대신 90년대 중반의 해괴망측한 10대 포르노를 연상시키기 일쑤다.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은 이 동영상의 중학생 ‘여주인공’이 목에 빨간색 스카프만 두른 알몸으로 남학생과 섹스행각을 벌여 ‘빨간 마후라’라는 별명이 붙은 탓이다.
미국엔 ‘빨간 마후라’ 아닌 ‘파란 천사(Blue Angels)’들이 있다. 똑같이 전투기 조종사지만 공군이 아닌 해군이다. 이들은 ‘빨간 마후라’처럼 공중전을 벌이지 않고 대신 아슬아슬한 공중곡예 쇼를 펼치며 민간인들을 즐겁게 해준다. ‘빨간 마후라’의 한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구식 F-51(’무스탕’)을 몰았지만 파란 천사들은 초음속 FA-18(‘호넷’)을 몬다.
제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미군 역사상 최초로 조직된 블루 에인절스는 ‘빨간 마후라’의 사실상 원조이다. 한국동란 초기 북한군의 미그 전투기에 밀린 미군은 항공모함 프린스턴 호에 블루 에인절스 팀을 배치했다. 당시 ‘악마의 고양이’ 편대에서 활약했던 자니 매그다 해군소령이 전사해 곡예비행이 아닌 전투 중 순직한 첫 ‘파란 천사’로 기록됐다.
애당초 3대로 시작한 블루 에인절스의 곡예비행은 지금은 두 배인 6대로 늘어 트레이드마크인 삼각편대(델타 포메이션)를 이룬다. 1~4번 기는 다이아몬드 편대로 일사불란하게 비행하며 5~6번 기는 초음속 수준의 단독비행으로 서로 마주보고 달리기, 등과 등(또는 배와 배)을 마주대고 달리기, 날개 끝을 서로 잇대어 달리기 등 묘기를 연출한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탑건 중 탑건들로만 구성된 블루 에인절스지만 워낙 위험한 곡예비행 탓에 적지 않은 희생자를 냈다. 발족 원년 에어쇼에서 로비 로빈슨 소령이 비행기 날개 끝부분이 부러져 추락사했고 1952년엔 두 비행기가 충돌해 조종사 한 명이 숨졌다. 지난해 4월에도 단독비행을 맡은 케빈 데이비스 소령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추락사했다.
‘파란 천사’들은 임무가 위험한 만큼 프라이드가 대단하다. 한국 공군 탑건들의 빨간 머플러처럼 이들은 블루 에인절스의 로고(문장)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는다. ‘한번 블루 에인절스는 영원한 블루 에인절스’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있다. 연중 이어지는 지옥훈련에도 불구하고 블루 에인절스가 되려는 지원자들이 꼬리를 잇는다.
그 ‘파란 천사’들이 올해도 시페어에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늘과 내일 I-90 다리와 520번 다리 사이의 워싱턴 레이크 상공에서 멋진 묘기를 펼친다. 먼발치에서라도 이들의 쇼를 지켜보며 초창기 한국공군의 영웅이었던 ‘빨간 마후라’들을 떠올려 봄 직하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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