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은 지금 평화롭고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아주 잘 살고 있지만 그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평화롭기는커녕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던 7년 전 그 때를 생각하면 사실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
동생이 결혼을 한다니 갑자기 친정집이 벌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그 여파는 단박에 태평양을 건너 우리집마저 덩달아 시끄러워졌다. 사실 나는 자초지종도 모른 채 그저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이 합심하여 동생 결혼을 결사 반대하니까 가족의 단결이라는 차원에서 나도 덮어놓고 올케 될 사람을 미워했었다. 때로는 내가 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어쨋거나 나로선 미워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했다. 하긴 입장으로 치자면, 친정 식구들은 충분히 반대할 이유가 있었고, 동생은 충분히 결혼할 이유가 있었다. 조금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 이 팽팽한 두 입장사이를 중재할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엄마는 그래도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그 중 객관적일 수 있겠다고 판단하셨던 모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는 국제 전화로 SOS를 청해 오셨는데 이쯤 되면 친정의 평화를 위해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명색이 누나이고 동생 일생의 중차대한 일에 누나 노릇은 한가락 해야겠기에 이메일로 한번, 전화통화로 한번, 그저 서두르지만 말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성질머리가 파르르한 동생은 나의 전과를 들먹이면서 누나도 반대하는 결혼 해놓고서 무슨 할말이 있냐며 입도 뻥끗 못하게 했다. 그래, 니 인생 니가 살지 내가 사냐며 그 이후론 정말 입도 뻥끗하지 않았는데 그게 훗날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모든 사람이 한마디씩 할 때는 한마디 덜어주는 것도 미덕이 될 수가 있다며 미덕론까지 운운하려 들었다.
하지만 때로는 한 마디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입장 차이는 종종 이 한마디의 의미를 이상하게 왜곡시킨다. 동생은 북새통 끝에 결혼을 했고 나는 자동적으로 동생 아내의 시누이가 되었는데, 내가 하는 한 마디는 때로 본의 아니게 올케에겐 ‘시누이노릇’ 이 되어 버리곤 했다. 작년 이 맘 때만 해도 그렇다. 올케가 내 친 동생이었어도 똑 같은 말로 주의를 주었을 텐데 올케와 시누이라는 그 놈의 입장차이가 서로를 가로 막고 나섰다. 나는 정말이지 시누이 노릇은 추호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할 경황도 안되고 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엄연한 서로의 입장 차이는 나의 이런 단호한 의지를 번번히 비웃곤 한다. 시누이라는 레떼르를 가진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올케에겐 충분한 ‘시누이노릇’이 되버리는 게 어쩔 수 없는 슬픈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존재는 각자의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존재를 품을 수 없는데 입장인들 품을 수 있겠는가.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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