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주말 산행 때마다 항상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 이해진 등산회장이다. 회장으로서 선봉장을 자임해서가 아니라 걸음이 워낙 빠른 탓이다. 환갑이 지났지만 딸 또래보다 날렵하다. ‘실력’을 바탕으로 지난 봄 시애틀 한인등산회의 회장에 선출됐다.
그녀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주 산에 오른다. 레이니어 산(뮈어 캠프)도, 세인트 헬렌 산도 올랐다. 필자는 멋모르고 그녀를 뒤쫓아 갔다가 산중턱에서 주저앉았었다. 이젠 젊은 남자회원들도 그녀에게 길을 비켜준다. 골프도 수준급이고, 테니스와 탁구도 즐긴다.
그런 이씨의 이야기가 지난 2일자 시애틀타임스 로컬판 1면에 대서특필 됐다. ‘스포츠 마니아’로 소개된 것이 아니다. 기사 제목은 ‘모두가 기뻐하는 메다이나 마켓 재개’였다. 메다이나 마켓은 빌 게이츠 동네인 메다이나의 유일한 그로서리이다. 이 마켓을 파란만장 끝에 8년 만에 다시 여는 업주 이씨의 환희와 감회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그날 꽃다발에 파묻혔다. 주민들이 그녀를 얼싸안고 축하했다. 이씨가 거둔 인간승리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 옛 꼬마고객이 엄마가 돼 아기를 데리고 새 가게 내부를 둘러보며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타지로 이사 간 단골고객들이 축하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를 구박한 시장과 시의원들도 뻔뻔하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씨는 이민 12년만인 1981년 주민들이 ‘그린 마켓’으로 부르는 이 업소를 매입했다. 타코마에서 학군 좋은 곳을 찾아 야로 포인트로 이주한 직후였다. 이 마켓이 처음 지어진 1908년 당시엔 주민들이 자동차 아닌 말을 타고 다녔고 워싱턴 호수엔 페리가 왕래했었다. 그 후 꼭 100년만인 올해 이 역사적 건물이 이씨에 의해 재건축된 것이다.
지난 2000년 이씨는 낡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자진휴업 했다. 그러자 소수 주민들이 “역사건물을 헐지 말라”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 보존하라”며 시비를 걸었다. 옛 것과 똑같이 짓기로 약속하고 이들을 달래자 이번엔 다른 몇몇 주민이 “메다이나엔 그로서리가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허구한 날 주민공청회에 나가 입이 닳도록 이들을 설득한 이씨는 100만달러를 들인 3년 공사 끝에 지난 5월 명물 마켓을 산뜻하게 복원했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됐다. 시정부가 건물에 그로서리만 입주하도록 제한했기 때문이다. 원래 2층을 임대할 계획이었던 시당국이 이씨에게 터무니없이 싼 임대료를 제시했다가 거절당하자 역사건물 용도 퍼밋을 내주지 않았다. 이씨는 가게 오픈까지 미루며 법정싸움을 벌여 기어코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머지않아 2층에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오게 돼있다.
개업식이 열린 2일 이씨 가게는 북새통이었다. 마침 블루 에인절스의 에어쇼를 보려고 호수가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뤘다. 그날 저녁 이씨는 피곤해 보였다. 이상했다. 그 정도 일로 피곤해 할 사람은 아니다. ‘드디어 해냈다’는 안도감이 밀려들면서 8년간 자신을 짓눌러온 스트레스가 개업첫날 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그동안 산에 그처럼 열심히 오른 건 긴장을 풀지 않으려는 방편이었을까?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약해지는 마음을 채찍질하며 이를 악물고 앞장서 올랐을 터이다. 그녀는 산행 도중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라는 찬송가를 곧잘 흥얼거렸다. 혼자서 반평생 꾸려온 사업을 접고 자기의 꿈인 선교사가 돼 태산험곡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난 3주간 이씨는 산에 오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선교사가 돼 메다이나를 떠난다 해도 ‘의지의 한인여성 사업가’가 남긴 전설은 세계최고 부자동네 사람들 입에 계속 회자될 것이다. 새로 지은 녹색 마켓이 앞으로 적어도 100년간은 끄떡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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