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뒷통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늘 답답했다.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릴때마다 그저 짐작으로 납작한 뒷통수가 가려지겠거니 한껏 부풀려 놓긴 하는데, 이게 제대로 모양을 잡은건지 아닌지 보이질 않으니 알 수가 없다.
정 보고 싶을때는 손거울을 들고 돌아서서 요리조리 살펴볼 수야 있겠지만, 그게 어디 다른사람이 정통으로 보는것에 비하랴. 엄연히 내눈에서 제일 가까운 내 뒷통수 인데 , 일평생 그 참모습을 볼수 없다는것이 이젠 궁금증을 넘어 답답증에 약 까지 오른다. 거울을 향해 뒤로 섰다가 빛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돌아서면 볼 수 가 있을까?
언젠가 아들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것보다 더 답답한것도 있다면서 ,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단다. 이게 무슨 불에 덴 상처에 염장 지르는 소린가 고 물었더니, 우리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거울로 보는 내 모습은 내모습이 아닌 나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반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거울 속 그녀는 나의 왼쪽 가르마를 오른쪽에, 나의 오른손을 그녀의 왼손에, 나의 오른쪽 눈이 윙크할때 그녀는 왼쪽눈을…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지 나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이쯤 되면 지금 글을 써내려가는 나나, 이글을 읽고 있을 독자나 , 답답함에 속이 이글 이글 타오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럴때는 이런 표현이 제격이지. “ ㅋㅋㅋ…^^” .
여기서 하나더,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 더 있다. (정말 죄송합니다!! 꾸뻑!) 그것은 우리의 내면이다.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 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바로 우리의 보여지는 사람 됨됨이의 모습.
나는 분명히 아침마다 거울로 꼼꼼히 내 모습을 본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참으로 ‘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내가 자신있게 말하는 나의 모습이 과연 내가 맞는 것일까?
만일 내가 나를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늘 하이웨이를 달리는 고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여기저기에서 혀를 끌끌 차며 “ 어쩜 저렇게 자기 자신을 모를까?” 라고 말하며 내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 분명하다.
바로 내가 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나고 자란 환경과 가치기준이라는 아주 주관적인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판단하고 또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리라.
모든사람들의 거울이 다 같지 않고, 모든사람들의 판단기준이 같지 않은 바에야, 어느 누가 말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또는 “ 그는 그런 사람이다” 라는 명제가 맞을수 있을까? 그렇다면 ,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 라는 새 명제를 놓고 좀더 객관적으로 좀더 멀리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먼저 들여다 보고 냉정하게 채찍질해 보는것은 아주 불가능한 것인가? 누구나 잘 아는 성경귀절 한귀절을 다시 읽으며 내 자신을 먼저 반성한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장 4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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