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참 더디 왔다. 달포 전에 이미 처서(處暑)가 지났고, 무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코앞인데 여전히 푹푹 찌는 복더위다. 이태 째 계속 된 가뭄 탓일까? 나뭇잎들은 단풍도 들기 전에 바싹 말랐다. 가을비나 밤새 내렸으면 맘놓고 단풍들텐데...
후덥지근한 산타아나 강풍은 몇 주 동안 캘리포니아 산하를 태우고 있다. 단풍대신 검붉은 화마(火魔)가 넘실대며 산과 마을들을 통째로 삼키고 있다. 잿더미 위에서 사람들은 울부짖고, 짐승들도 넋을 잃은 채 숲 속을 헤맨다. 이런 재해 속에서 어떻게 나무들이 편히 단풍들 수 있을까? 열매조차 영글지 못하고있다.
나무들 사이에 선 나를 본다. 나도 그들처럼 세월에 뒤쳐져 휘청대고 있다. 내 여름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달력 속엔 가을이 깊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세월은 거침없이 나를 앞질러 간다. 열매 없는 손은 텅 비었는데...
매년 가을이맘때면 닥터 김종대 형과 이스트베이 자선합창단 공연을 준비했었다. 1997년 첫 공연 때, 70여명 창단 멤버들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감격하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멋진 연출가였다. 공연 때마다 클래식 성가와 오페라, 흑인영가 등 다양한 출연진과 레퍼토리로 천 여명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또, 그는 10여 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모금한 30여만 불을 무숙자와 장애인 센터 등에 합창단 이름으로 기부했던 참 봉사자였다. 헌데 김형은 3년 전, 60갓 넘어 하늘 나라로 갔다. 암에 걸려 더 노래 못하는 사정을 단원들에게 일일이 자필 편지로 알린 후 훌훌 털고 갔다. 바람 세차게 우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합창단 멤버 중에 임덕환 형이 있었다. 과묵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베이스파트가 부족할 때마다 내 등을 두드리며 자리를 채워주셨다. 나중 알고 보니 수필가 주대식 형의 죽마고우였다. 올 봄, 주형의 첫 수필집을 친구들이 추렴해 내었다는 얘길 듣고 참 부러웠다. 각박한 이민사회에 핀 우정어린 미담이었다. 그런데 그 임형이 한창 나이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누가 자리를 지킬 것인가? 하늘을 보니 가을 철새들이 묵묵히 날고 있다.
북가주 올드타이머 김종훈 선배는 인기가 많은 분이다. ROTC 1기 고참임에도 격의 없고 밝은 인품 때문에 주위엔 후배들과 신나는 일들이 끊이질 않는다. 세상의 어떤 불행도 잘 타일러 행복으로 바꿀 만큼 긍정적인 사변과 실천력의 소유자다. 헌데 아버지처럼 만능 스포츠맨이던 큰 자제 분이 산악자전거 사고로 변을 당한 것이다. 수년 전 결혼식 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기뻐한 효자인데다 친구들의 자랑이었다는데.. 김 선배님은 참척(慘慽)을 감추고 오히려 조문객들을 포옹하며 위로해 주신다. 그 의연함에 눈시울을 붉히는 데 가을연가가 울린다.
열린문 선교회, 문승만 장로님의 부음을 들었다. 평생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사시다가 67세로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수단에 재봉틀과 시리아에 성경을 보내실 무렵 자선합창단의 도움을 청하며 전화하셨다. 선교지의 자녀가 바로 내 자녀입니다 하시던 말씀이 귀에 선하다. 암투병중에도 끝까지 보이신 선교에의 열정은 큰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 참 크리스챤이 남긴 영적 열매가 가을하늘만큼 숭고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야 올 가을이 왜 더디 왔는지 알 것 같다. 나무들은 아름다운 분들이 서둘러 가심을 슬퍼하며 차마 단풍단장을 못했던 탓이리라. 아니면, 그분들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려 했던 나무들의 속 깊은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분들의 못 다한 삶까지 살아야하는 게 남은 자들의 몫일 게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그들의 삶을 감사함으로 기리는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를 일이다.
올 아침엔 불타는 단풍이 참 곱다. 아! 드디어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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