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기어이 폭탄을 터트렸다. 남편과 갈라서기로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외출을 했다가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남편이 거기 좀 앉으시오. 할 얘기가 있으니…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땅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듯 했다.
70 평생에 이렇게 큰 충격은 처음 인듯하다. 도무지 몸과 마음을 가눌 길 없고 캄캄한 밤중에 길을 잃은 미아가 된 심정이다. 얼마가 지났을까. 세상이 멈추어 버렸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을 가눌 길 없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40여 년 전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했을 때, 그 벼락 맞은 것 같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간 아무런 내색도 없어서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닷가에 새 집을 장만하고 곧 이사할 날만 고대하고 있던 처지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두 아들을 서울에서 입양하여 이제 첫아들은 5살, 둘째는 겨우 2살 반인데, 두 아이의 장래는 어쩌자는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밀려닥치는 의문과 궁금증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내가 이리 마음이 아플 때 본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파왔다.
고통과 씨름하고 있을 아이에게 아픔을 더 해 줘서는 안 되겠기에 우선 큰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딸의 말은 아직 (동생과) 얘기를 못 나누었는데 가족으로서 우리가 할일은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무조건의 사랑을 보이는 일이란다. 무조건의 사랑 - 옳은 말이다.
나는 40여년을 미국에서 살았으니 세월로 보면 미국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이다. 결혼 초에 세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고, 직장 운이 좋아서 이름 있는 국제기관에서 근 30년 일하다 은퇴했다. 미국 문화권에 잘 적응하고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도 딸의 이혼이라는 충격적 소식을 접하자 완전히 혼동 속에 시달리고 있다. 이곳에서 자란 딸들은 철두철미 ‘아메리칸’이다. 그 아이들은 내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쏟아지는 숱한 의문과 궁금증을 가슴에 묻고 일체 발설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당사자이고 엄마인 나는 제3자일뿐이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몹쓸 딸들이 있단 말인가? 제 인생문제를 놓고 걱정하는 마당에 부모는 완전 제3자 취급을 하니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미국적 정서라는 말인가.
한국의 정서는 그렇지가 않다.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곳, 네 문제, 내 문제 가리지 않고 서로 매달리고 서로 엉켜 울음 범벅을 이루는 곳, 그 곳이 나의 고향이 아니던가.
기온이 싸늘해지고, 아침저녁으로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날, 딸의 이혼 결정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더욱 그런 푸근한 곳이 그리워진다.
마음으로 그런 고향을 그리면서, 나는 또다시 따스한 메시지를 딸에게 보낸다.
“I love you. I will be there whenever you need me”
이동우
플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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