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휴 마지막 날부터 끙끙 앓기 시작한 남편.
머리가 깨지네, 온 몸이 흠씬 맞은 것마냥 아프네, 오들오들 오한이 나네, 속이 울렁거리네, 갖가지 증상을 늘어놓더니 이불속으로 들어가선 나올 생각을 않는다.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출근은 고사하고 종일 자더니 그 다음날 겨우 몸을 일으켜 나가는가 싶더니만 이내 조퇴를 하고 들어온다.
아프면 누구나 만사 귀챦겠지만, 이 틈을 타서 양치질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는 남자들 꼭 있다. “아파도 좀 씻고 잘 수 없어?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나면 개운하니 훨씬 나을텐데” 마누라의 애걸복걸 잔소리에 마지못해 휘적휘적 욕실로 걸어 들어가는 남편 뒤꼭지가 안스럽기는 커녕 미깔스럽기만 하다. 왜냐, 일단 아프면 평소의 게으름병이 거세게 도지면서 자리보전하는 상감마마가 되어버리는 걸 당연시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우 TV 볼 기운만 남았다는 듯 리모콘을 끼고 담요를 둘둘말고 앉아있는 걸 보면 저거 꾀병에 엄살 얹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다 든다.
그래도 남편은 병가라도 내니 그게 어딘가.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난 아파도 쉬지도 못하는데. 아파도 애들 학교 데려다줘야 하고 끼니 맞춰 밥해야 하고 씻기고 숙제 봐줘야 하고 …그게 다 내 몫인데. 월급없는 직업. 그래서 병가는 커녕 조퇴도 지각도 하지 못하는 직업 말이다. 서글픈 내 직업, 주.부. 주부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부 연봉이 어마어마 하다고? 하지만 그런 말 따위 기운빠져 퉁퉁 불어있는 내 귀에 쏙쏙 들어올 리 없다.
아이들은 아빠가 회사를 안 가니 금새 ‘아빠 많이 아파?’하고 걱정스레 묻는다. 이런~! 심지어는 별 게 다 질투가 난다. 대충 입에 약 털어넣고 운전대 잡고 왔다갔다 앞치마 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엄마는 어지간해선 몸져 눕지도 않으니 말이다.
아이를 픽업해서 집에 오니 퇴근길 약국에 들러 사다놓았는지 못 보던 감기약 한 병이 눈에 뜨인다. 안 그래도 몸살이 오래 가는 것 같아 남편 대신 병원에 전화를 했었지만 오늘은 스케쥴 꽉 찼으니 내일 오든지 급하면 urgent care를 가라는, 참으로 무심한 대답만 들었던 참이었다. 이곳에선 병원 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 여간해선 맘대로 아플 수도 없다.
애들이 콜록콜록거려도 시럽 한 병 안 사오면서 자기 몸이 곤하면 번개같이 뭔가를 사들고 오는 남편, 은근히 괘씸하다. 자기 몸 잘 챙기는 것도 유전인가 보네, 궁시렁 궁시렁……
솔직히 나이 들수록 스스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마는.
건강 검진 때 맞춰 받으시고 몸에 좋은 약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나의 시어른들이, 말없이 병 키우면서 딸내미 애달프게 하시는 친정 부모님보다, 자식된 입장에선 그저 훨씬 맘 편하고 감사해야할 따름인 거 맞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마음 한 구석 뭔지 모를 감정이 뾰로통하게 솟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얘들아, 아빠 아파서 일찍 들어오신 거니깐 시끄럽게 하지 말고 저쪽 방 가서 놀아.”
가능한 부드러운 말을 내뱉으며 아이들을 방에서 내몬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되는대로 퉁바리 놓는 걸 잊지 않는다.
“어디 가족 여행이라도 갔다 와서 몸살 난 것도 아니고. 연휴 내내 식구들 팽개치고 골프장으로 출근하더니만, 아주 장하십니다 ~!. ”
하지만 어쩌랴, 나의 직업은 주부인데.
아플 때 소홀히하면 두고두고 원망 들을 걸 알기에 나는 얼른 콩나물이랑 쌍화탕을 사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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