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계실만한 시간에 맞춰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어? 아빠는 안 계신가보네. 어디 나가셨어요?”
“아이구 요즘 연말이라고 이래 저래 전화받느라 바쁘시다.”
아 참, 그렇지! 연말이지! 그 그리운 송년회를 그새 까맣게 잊어버렸네… 하긴 이 곳에선 12월 달력을 넘기자 마자 크리스마스 광풍에 휩싸여 다른 건 떠올릴 겨를이 없기도 하다.
뜻도 제대로 모르는 중학생 시절에도 얘들아, 우리도 송년회 한 번 해야지, 이렇면서 친구들이랑 스케이트장도 가고 분식집도 가고 그랬었는데. 그 땐 무조건 12월에 만나면 다 송년회가 되고 망년회가 되는 줄 알았다.
술 한 번 진창 마실 번듯한 기회로, 변변한 남자친구 하나 없는 신세 타령할 기회로, 취직의 고단함을 토로할 기회로, 그리고 나를 억누르던 온갖 괴로움들, 허나 지금은 전혀 생각도 나지않는,을 풀어버릴 기회로, 그렇게 대학시절의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으레 시계처럼 되돌아오는 송년 회식 따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사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런 마지막으로 보내는 겨울이라는 그럴듯한 꼬리표를 달아 12월의 수첩은 그렇게 커피집과 밥집 술집 이름들로 미어터질 듯했다.
한 장 남은 달력이 팔랑거릴 즈음이 되면, 소원했던 사람들에게도 맘 먹고 연락을 해서 ‘해 넘기기 전에 한 번 보자’는 말을 어색하지 않게 내뱉을 수 있게되는, 그렇게 만들어주는 12월의 힘, 송년회.
이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나에겐 송년회라는 말이 그저 부러운 잔치 이름만 같다.
남편은 (가족을 쏙 뺀) 직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다, 이런저런 연말 모임이다 하면서 연달아 불콰한 얼굴로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대비 충분히 용납할만한 수준이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방학 전 학교에서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를 기다리는 눈치다. 아마도 캐롤을 뽐내는 무대 보다는 빨간 스프링클이 잔뜩 뿌려진 크리스마스 쿠키와 선생님의 작은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제각각 나름대로 한 해를 매듭짓는 노력들을 하는데, 나라고 그냥 구경만 하란 법은 없쟎아.
고만고만한 동네 엄마들을 모아 아이들이 없는 오전 시간을 틈타 다방 모임을 하기로 한다.
우리도 우아하게 커피 한 잔 마셔보자구요.
그래도 다들 밖으로 나갈 주변머리들은 없는지라 (어쩌면 대형 기계에서 뽑아져 나오는 근사한 향기에 젖어 어색한 발음으로 크게 호명되는 내 이름을 행여 놓칠까 불안해하느니 슉슉 뿜어져나오는 주전자의 입김을 보면서 커피 설탕 프림 일대 일대 일이야,라고 외치는게 편한 탓인지 모른다), 과자 한 봉지 사과 한 알씩 주섬주섬 들고 모인다. 딱히 송년스러운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찻잔의 온기만큼이나 부드러워진다.
우리 모인 김에 송년 저녁 모임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누군가의 제안에 다들 어린애들처럼 눈을 반짝이며 좋아라한다.
그래그래, 남편들에게 애 맡기고 저녁 외식하자. 어디가 좋을까? 언제가 편해? 일사천리로 정해지는 약속들에 웃음이 난다. 언제나 외식은 일 순위가 아니었던 우리들, 한국의 간편하고 맛있는 외식문화를 부러워하며 각자 만든 음식들을 싸들고 모이던 우리들, 드디어 우리들도 mommy’s night out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부모님도 친척들도 동창도 동료도 친구들도 없는 이 곳에서 보내는 연말이 조금은 쓸쓸할 때도 있지만, 그네들과 함께 보냈던 이런저린 시간들이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그게 뭐 대수겠어. 가장 가까운 내 가족들이 이렇게 옆에 있는데. 서로 아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서랍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한 뭉치 찾아 꺼내두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 본체만체하는 가족들에게, 저녁 모임에서 함께 수다 떨 아줌마들에게, 그리고 만년 결석인 머나먼 송년회의 지인들에게,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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