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절친한 친구의 손님방에는 아름다운 조각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수년간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나의 시선에 늘 경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친구는 이 작품을 한 조각가가 무명이라는 점이 더욱 감동을 준다고 말한다.

나의 방에도 이 포스터를 붙여 놓았는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구해온 것이다.

세계의 예술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에 속하는 이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이라는 조각품은 실제로 바라보면 조각의 높이만큼 커다란 배의 형상을 한 대리석 위에 있는데 인간의 정신이 신의 손길과 함께 한 듯 말할 수 없이 드높은 예술 정신을 보여준다.

로마에서 밤기차를 타면 아침에 이탈리아의 최남단 도시인 브린디시에 내린다. 브린디시는 그리스로 향하는 배를 타는 항구 도시이다.

아련히 마음속에 기억하는 브린디시의 추억. 지구 위의 삶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가장 아름다운 환영일 듯하다.

밤 새 기차를 타고 아침에 브린디시에 내린 나는 그날 저녁 다시 밤배를 타야 했기에 호텔에 들러 지배인에게 로비의 소파에서 눈을 좀 붙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지배인이 깨워 TV를 가리켰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 폭력 사태가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탱크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격한 나를 달래줄 생각이었는지 지배인은 한 소년을 불러 나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주라고 한 모양이었다.

하얀 모래와 파란 하늘. 초록의 바다와 따뜻한 햇살 … 헤어지는 나에게 소년은 ‘띠아모(사랑해)’라고 속삭였다. 지중해를 닮은 길고 푸른 소년의 눈빛. 열아홉쯤으로 보이던 소년의 싱그러운 젊음과 그날 TV에서 방영되던 폭력과 억압의 살육 장면, 아름답던 바다의 기억이 오버랩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 저항의 의무와 삶의 불가해함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스의 하늘과 바다는 밝고 고요하고 아늑했다. 가장 고위한 예술품과 신화를 탄생시키고 고대 문명이 태어나게 한 바다를 바라보며 왜 그러한 예술이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그리스 적인 것의 느낌이 그 바다에 있었다.‘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은 해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네 눈의 곡선이 내 마음을 맴돈다
춤과 유연함의 원형
시간의 후광, 밤의 안전한 요람
내가 살아온 내 모든 삶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네 눈이 나를 언제나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의 나뭇잎들과 이슬의 이끼
바람의 갈대, 향기로운 웃음
빛의 세계를 덮는 날개
하늘과 바다를 실은 배
소리의 사냥꾼과 여러 색깔의 샘물

새벽의 알에서 부화한 향기
별들의 밀짚 위에서 늘 머물고 있는
빛이 순수성에 비례하듯이
세계는 너의 순수한 눈에 비례한다
그리고 나의 피는 네 시선 속에서 흐른다.

<폴 엘뤼아르 ‘네 눈의 곡선이 내 마음을 맴돈다’>


옛 전쟁은 사라졌고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지만 예술은 영원히 인류의 상상력을 드넓혀 갈 것이다.

며칠 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았다. 마치 그리스의 신상을 보는 듯 느끼게 만드는 스타들의 아름다움은 내 의식 속에서도 가장 힘차고 고결한 기억들을 불러 일으켰다.

별처럼 아름다운 눈빛들을 바라보며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에 다시 경탄했던 밤이었다.


박혜숙
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