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집 ‘사소한 인류’(김영사, 2025)가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일상을 담은 에세이집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선뜻 응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나는 학계의 검증을 거친 과학 지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객관적 데이터와 엄밀한 논증으로 말하는 과학의 세계에 속한 고인류학자로서, 주관적인 감상과 사사로운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과연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정중히 거절했을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공교롭게도 당시 캠퍼스에 혼란과 위급한 상황이 계속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불을 끄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시기였다. 그런 때에 거대한 담론과 첨예한 갈등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소한 일상’에 집중해서 글을 써보는 일은 숨통이 트이는 경험이자 일종의 정신적 도피처가 될 것 같았다.
의문과 두려움을 접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연 에세이를 쓰는 일은 낯선 세계였다. 처음 써서 편집자에게 보낸 에세이는 뼈에 대한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화석을 다루는 내 본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고인류학자의 시선에서 쓴 글이었다. 빼곡한 편집자의 피드백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힘을 빼야겠구나. 내가 세상에 보이는 고인류학자라는 정체성에서 힘을 빼야 했다.
그러자 정체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 딸, 엄마, 아내, 이민자, 유학생, 교수, 그리고 최근에 더해진 견주까지. 이 모든 정체성이 내 사소한 일상을 보는 눈이 되어 목소리를 보탰다. 고인류학자라는 정체성도 내 사소한 일상에 목소리를 보탰다. 내 평범한 일상 속에는 이미 다양한 정체성이 녹아있었다.
비 오는 날 캠퍼스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순간, 창피함과 동시에 인류 진화의 첫걸음이었던 ‘두 발 걷기’의 취약성을 떠올렸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무게를 한 발로 버텨야 하는 직립보행은 우리를 넘어지기 쉬운 존재로 만들었다. 멀쩡하게 걷다가도 넘어진다는 평범한 사건은 인류가 의무적 직립보행을 선택한 독특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움직임으로 수백만 년을 살아온 인류에 대해 경이로움도 새삼스럽게 느꼈다. 몽고(반)점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에 얽힌 인종 분류학의 역사를 떠올렸고, 어느 산문집에서 남성 중심으로 그려진 선사 시대의 풍경을 읽고는 그 편향성에 대해 쓰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더해진 ‘견주’라는 정체성은 나를 인간과 개의 깊은 역사로 이끌었다. 이 책에 강아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강아지는 내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면, 손끝이 아니라 내가 가리키는 대상을 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던 고도의 공감을 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늑대와 연대해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는 가설부터 시작하면 두 종의 관계는 수만 년 이어져 왔다. 그런 이야기를 포함해 나는 36편의 에세이를 책에 담았다.
그동안 내가 쓴 대중 교양서들은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소한 인류’는 다르다. 학계 동료를 위한 전문적인 내용도, 과학 지식을 쉽게 풀어 전달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중년을 지나 노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시간 속에서 건져 올린 내 일상의 생각과 감정들을 나누고 싶었다.
놀랍게도 이 책은 과학, 인류학/고고학, 그리고 시/에세이 분야에서 동시에 주목받고 있다. 여러 분야에 걸친 책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과학과 인문학, 예술을 구분하여 바라보는 일은 근대 학문이 만들어 낸 비교적 최근의 습관이다. 어쩌면 이제 다시 분야의 경계를 넘어 유기적으로 사유하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살아보니 내 삶은 하나의 곧은 줄기가 아니었다. 이력서만 보면 한 방향으로 달려온 듯 보이지만, 실은 크고 작은 강줄기들이 합쳐지고 갈라지며 큰 바다로 향하는 강물과 같았다. 고인류학자인 동시에 이민자이자 여성이기에 학계 주류 담론 속에 숨어 있는 편견과 배제의 역사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고, 다양한 렌즈는 내 연구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했다.
‘사소한 인류’는 바로 그 다채로운 렌즈로 바라본 일상의 기록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사소한’ 일상에서도 ‘인류’의 거대한 역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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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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