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의 시애틀
시애틀은 누가 뭐래도 국제도시다. 스카이라인에 톡 튀는 스페이스 니들이나 다운타운을 휘도는 I-5 프리웨이 덕분이 아니다. 그런 것 없이, 썰렁한 다운타운 너머로 레이니어 산만 덩그렇게 보였던 100년전부터 시애틀은 이미 국제도시로 떠 있었다.
스페이스 니들은 1962년 시애틀 세계박람회의 상징물로 세워졌다. 요즘 삐걱거리는 고물 모노레일도 그때 가설됐다. 그러나 그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 또 다른 국제 박람회가 시애틀에서 열린 사실을 아는 한인은 많지 않다. 비행기는 물론 버스도 없던 그 시절에 관람객을 거의 400만명이나 유치했다. 미국 역사상 흑자를 낸 첫 박람회였다.
금년은 1909년 워싱턴대학(UW) 캠퍼스에서 열린 ‘알래스카-유콘-퍼시픽 박람회(AYPE)’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당시 박람회는 6월1일부터 10월16일까지 열렸지만 오늘 UW 근처 시애틀 역사산업박물관에서 개막되는 100주년 기념사진전을 필두로 이달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련기관들이 세미나와 음악회 등 각종 기념행사를 잇달아 펼친다.
AYPE는 1897년 알래스카와 유콘(캐나다) 지역에서 터진 ‘골드러시’로 10여년간 급성장한 워싱턴주가 벌인 잔치였다. 당시 전 세계에서 몰려온 노다지꾼들은 전진기지인 시애틀에서 금덩이를 팔아 번 돈을 흥청망청 썼다. ‘노스 투 알래스카’라는 60년대 영화에선 존 웨인이 동료 노다지꾼인 스튜어트 그레인저의 신부감까지 시애틀에서 구해간다.
20세기 초 열린 박람회지만 기상천외한 게 많았다. 전화 줄 없는 전화기(워키토키), 조산아 인큐베이터, 연어 자동도살기계 등 ‘첨단제품’이 눈길을 끌었다. 최초의 대륙횡단 경주 끝에 뉴욕에서 시애틀에 도착한 ‘최신형’ 자동차들과 박람회장 상공에 뜬 비행선도 관람객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필리핀 원주민 ‘이고로트’부족 50명이 동네째 옮겨와 초가집을 지어놓고 관람객을 맞았다. 한인과 비슷한 용모의 알래스카 에스키모들도 동원됐다.
특히, 박람회 기간 중 전국 여성참정권 협회가 시애틀에서 연차총회를 개최해 전국에서 수백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속속 시애틀에 도착했다. 이들이 탄 기차에 ‘참정권 특급’이라는 별명이 붙는 등 여성 참정권 캠페인의 열기가 박람회장 안팎을 휩쓸자 워싱턴 주정부는 이듬해인 1910년 11월8일 선거부터 타주에서처럼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 해 8월 한국에선 한일합병 조약이 강제로 체결돼 한국인들은 참정권은커녕 나라 자체를 빼앗겼다. 한인 이민조상 102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인부로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이 1903년이었다. 시애틀 박람회가 열리기 6년 전이다. 거의 400만명이나 몰린 국제박람회에 한인이 한명도 없었던 게 당연하다. 한국인이 국제화도려면 아직 멀었을 때였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는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옛날 일을 돌아보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공자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가르쳤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박고지금(博古知今)’이라는 노자의 말도 비슷한 의미다. ‘옛것을 널리 알면 오늘 날의 일도 자연히 알게 된다’는 뜻이다.
시애틀 박람회가 열렸을 당시 미국 내 한인은 사탕수수농장의 102명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지금은 공식 센서스 집계만 156만명이다. 100년간 1만5,000배나 늘었다. 앞으로 100년간에도 그런 추세는 못 돼도 괄목할 만큼 늘어날 것이 자명하다.
오는 2109년 우리 4~5세 가운데 주지사나 대통령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반대로, 한인보다 더 빨리 늘어나는 중국, 필리핀, 인도, 베트남인에 치어 별볼 일 없을 수도 있다. 단합보다 분산, 주류사회보다 본국 쪽을 더 돌아보는 우리 폐습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린 1909년의 시애틀 박람회 때처럼 아직도 국제화가 덜 된 민족인 모양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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