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출간된 부조리극의 효시로 알려진 새뮤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후 황폐해진 삶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이 뜻하는 바를 온전히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한 대목은 내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1막 말미에 등장했던 팔려가던 늙은 종 러키의 주인 포조는 2막에서 눈이 먼 채 등장한다. 곤경에 빠진 그는 살려달라고 외친다.
무료함에 지쳐가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 공은 포조를 도울지 말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블라디미르가 결론을 내리듯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니, 기회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는 포조의 외침이 꼭 자기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둘 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대목에 방점을 친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누군가를 돌보거나 보살필 때인 점을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 자주 가는 이유는 연로하신 형님을 뵙고 인사드리기 위함이다. 누구나 형제간의 우애는 비슷하겠지만 나의 형님은 특별한 분이다.
40년 동안을 남보다 배의 일을 해 자녀 4남매를 고급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하고, 노후를 위해 저축한 돈을 어려운 이웃이 빌려 달라면 당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해 지금은 완전히 빈손이다. 그럼에도 불평보다는 본인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으로 위로 한다.
지금은 자식들이 조금씩 도와주어 생활하던 중 금년에는 70세 고희를 맞아 자식들이 돈을 모아 엄마 아빠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시라 권했는데 공무원들의 넉넉지 못한 봉급에서 모아온 돈인 줄 알기에 여행 결정을 망설이던 중 TV 방송 뉴스 시간에 어느 중년 여인의 딱한 사정과 계좌 번호를 접하고 여행 목적의 돈 전액을 입금하고 자식들에게 여행한 것보다 마음이 더 즐겁다고 말씀 하셨다며 인사차 나를 찾아와 보고한다. 아니, 조금은 허탈감이라 표현해야 할 듯 싶다.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고 고백한다.
나는 감동의 흔들림이 얼마동안 계속된 후 조카들에게 반문 아닌 위로의 말을 했다. 엄마, 아빠가 그런 부담을 갖고 여행을 다녀오신 것보다 지금이 덜 행복할까?
똑똑한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주제넘다거나 아둔하고 영웅심의 결과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이란 두 해안 사이에 걸린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
해안의 한쪽은 ‘동물’의 세계이고 다른 한쪽은 ‘신성’의 세계이다. 내림길인 동물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지만 힘겹더라도 신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 공은 타고난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곤경에 처한 포조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은총이 선하신 형님 내외분의 생애에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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