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 (수필가)
이북 오도청(五道廳) 북가주 지회의 J 목사님께서 실향민 고국방문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다. 6.25때 납북 당한 아버지의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온 우리 가족사를 어렴풋이 알고 계신 어른께서 전갈을 주신 것이다. 부친의 동향 분들이 더 연로하시기 전에 한번 뵙고, 고향얘기 들으며 선친을 그려보는 것도 효도가 아니겠소?
애초 북한이라면 갈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를 앗아간 공산당, 동족상잔을 빚은 그 집단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허나 고국방문 행사는 의미가 달랐다. 실향민들과 그 자손들을 선친의 고향 별(別)로 만나게 배려해 고향 모습을 구체적으로 들을 기회를 주었다. 특히 해외 동포들에겐 고국의 발전상을 가까이 보고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일 먼저 만난 고향 분은 우리일행을 이곳, 샌프란시스코서부터 인솔해 가시는 K 단장님이셨다. 평북선천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시는 그는 곧 팔순이신 데도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에 부지런하셨다.
열댓이나 되는 일행들의 동태를 늘 챙기시고, 매시간 일지를 쓰셨다. 오랜 군 생활에서 익힌 습관이기도 하겠지만, 평안도 분 특유의 기질인 듯 했다. 아마 내 아버지도 살아 계신다면 저렇게 부지런하고 자상하시겠지, 그의 웃는 눈매에서 육친의 정이 느껴진다.
전 세계에서 서울로 모인 실향민들은 한 2백 명쯤 됐다. 평북 선천, 정주가 고향인 분들이 약 30명 남짓, 제일 많았다. 도지사와 장관 만찬에 이북 5도와 미수복지 별로 나뉜 잘 차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대개 초면들이지만 고향을 기억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담소했다.
유심히 어른들을 살펴본다. 고향 산천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대개 고희를 지나 팔순에 가까웠다. 민족 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공산당 때문에 아직도 고향을 못 가본 한 많은 우리들의 혈육이셨다. 애써 웃으시며 담소하는 표정 속에 내 아버지와 삼촌, 숙모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혹시 내 부친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까하고 함자를 열심히 불러드렸지만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그런데 만찬 중 화장실로 가던 나는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한국엔 방과 방, 공간과 공간사이 문턱이 있는 게 우리가 사는 미국과 달랐다. 무심코 들어가다가 걸려 무릎을 심하게 다친 것이다. 다음 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뼈에 금이 갔다. 문턱을 왜 만들어놓았을까? 모든 걸 확실히 나누고 분할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의 정서 때문일까?
사실 남과 북을 갈라놓은 휴전선도 민족분열의 문턱이었다. 내 아버지와 나를 갈라놓은 높디높은 장벽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사이에도 높은 문턱이 있었다. 지방색의 벽이었다. 그리고 둘러보면 한국은 모두 문턱으로 갈라져 있었다. 진보와 보수, 학생과 선생, 노조와 기업, 노사모와 비노사모. 친이와 친박.
나는 행사 내내 목발을 집고 다녔다. 목발은 상한 다리에 힘이 쏠리지 않게 하고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었다. 걷는 속도는 느렸지만 참 유용했다. 과연 한국사회의 파행적 사태를 치유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목발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허나 다음날, 국민장이 막 끝난 시청 앞을 지나다가 노란 완장 데모대에 밀려 목발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아픈 무릎을 쥐고 대로상에 뒹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그 지긋지긋한 이데올르기의 문턱에 다시 걸려 넘어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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