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서울에서는 식량이 떨어졌었다. 난데없이 열살 미만의 아이들이 나란히 길가에 앉아 과일을 팔았던 것은, 그 때에도 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공산치하에서 통용되었던 화폐는 남한에서 사용하던 돈이었다.
어느 날 인민군복을 입은 청년이 배를 사려고 돈을 내놓았는데 “우리는 빨간돈은 받지않아요”라고 아이들이 합창하듯이 말하였다. “이것은 돈인데 왜 안 받는다는 것이냐?” “그것은 쓰지 못하는 돈이에요” 따발총을 메고 있던 인민군은 화를 내면서 물러났고, 야무지게 대답한 아이들은 아무도 그에게 과일을 팔지 않았다. 물론 빼앗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돈도 없고, 감자도 구할 길이 없었다. 막막하기만 하던 그 무렵, 동네의 상냥한 산파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문자 어머니,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아요? 제발 그러지 말고 서울대학병원에 와서 일을 도와요. 밥은 먹여주니까요.” 라고 말하였다. 전쟁도 치열하여서 북한이 뒤로 밀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대학병원의 식당에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점심시간이 끝나는 때에 맞추어 식당에 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밥 한공기를 얼른 주었다. 한숫가락을 입에 넣으려는데 점검을 하는 인민군 장교가 갑자기 들어왔다. 나는 엉거주춤 밥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그의 날카로운 눈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당황하였고, 식당 책임자 아주머니는 “어린아이쟎아요, 괜챦아, 밥을 먹어도 돼.”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 인민군은 말없이 식당을 나갔는데, 나는 그 때의 무안함과 모멸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옷속에 밥 한덩이를 넣어주었다. 나는 당당하지 못하여 주뼛거리며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잊지 않고 일러주었다. “ 엄마를 보고가는 중이라고 말하거라” 그렇게 밀반출된 주먹밥으로 갓 해산한 옆집의 아기엄마도, 우리 가족들도 기아의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은 피를 팔아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하였다. 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그 당시의 형편 때문에라도 아주머니들에게 밥은 마음대로 먹게 허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마니, 오마니 하고 울고있던 인민군들이 너무 불쌍해.” 라고 어머니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남한의 피가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수혈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국군에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서 인민군에게 아들의 평민옷을 몰래 입혀서 탈출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도 인민군에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서 국군에게 평민의 옷을 몰래 입혔던 북한의 부모들도 있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란 모두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서울이 수복된 다음, 그 상냥하였던 산파 아주머니가 체포되었다. 살아난 동네 사람들은 산파아주머니의 구명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석방된 후 산파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아주머니의 남동생이 연주하던 바이올린의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6월이 되면, 내 동생들의 출산을 도와주기도 했던 산파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한 여름의 병원마당에 가득하였던 부상병들. 아주머니들. 거리에서 함께 과일을 팔던 아이들. 아직도 살아있을까. 우리는 1950년 그 해 여름을 모두 함께 견디지 아니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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