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나니, 동두천에 계시던 외가에서 서울에 있는 우리집으로 피란을 오셨다. 그 뒤를 이어서 의정부에 사시는 외삼촌이 해산을 한지 3시간 밖에 되지않은 외숙모와 아이들, 그리고 사돈들을 데리고 역시 걸어서 우리집으로 오셨다. 우리집에서 산파를 불러 아기의 탯줄도 알맞게 다시 자르고 사력을 다하여 걸어왔던 산모는 마침내 쉴 수가 있었다. 갑자기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식구들이 30명이 넘게 불어나게 되었다. 그 분들은 묵은 간장과 고추장도 다 떨어졌을 때에 다시 남쪽으로 피란을 하려고 떠나갔다.
우리는 남쪽이라고는 해도 천안과 진천에 친척들이 사시고 그 곳도 이미 공산군에게 점령되었으니, 피란을 갈 곳도 없었고 막내동생은 겨우 첫돌이 지난 아기였다. 아마도 그래서 서울에 그냥 눌러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밤에는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몰래 우리집에 숨어들기도 하였는데, 역시 서울은 위험해서 다시 밤을 타고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가시기도 하였다.
공산정권 밑에서 지치고 지쳐있던 어느 날 어머니의 여동생, 나의 큰이모가 늙은 호박 두개를 가지고 느닷없이 우리집에 나타났다. “아니, 얘. 여기는 왜 왔니?” “언니, 나 정말 수원에서 지긋지긋했다우. 먹을 것도 시원치않고, 시집에서 농사일 하느라고 정말 힘이들었어.” “그래도 그 곳에는 먹을 것이라도 있지. 서울엘 오다니…” 어머니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호박 두 개를 머리에 이는 것이더군. 이리저리 굴러서 양쪽으로 늘어지는데 머리에 올려놓을 수도 없고, 들고 오기에는 너무 무겁고…. 그나저나 여기에 이렇게 먹을 것이 없는 줄 알았더라면, 다른 것을 들고 오는건데…. 그러나 시골에서도 가지고 올 만한 것은 호박밖에 없더군. 뭐, 호박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났지?” 어머니는 여전히 기가 막혔다.
이모가 서울에 와서 겨우 한 일이란 것이, 굶주리면서도 밤마다 어머니와 부역에 끌려나가 찻길에서 모래자루에 모래를 퍼넣는 것이었다. 그 때 공산치하의 서울에서는 모래자루를 쌓아올려 시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포까지 끌려가서 밤새 일하고 아침에 돌아온 이모가 말했다. “ 가만히 보니, 모래성 뒤에 숨어서 국군을 총으로 쏘려는거쟎아? 그래서 나는 모래를 자루에 넣지않고 땅에다 버렸지. 우리 작업반은 밤새도록 겨우 두 줄을 쌓았거든. 하, 그리고 그 녀석들의 대답이라니. 내가 물었지. 저 한강 너머의 하늘이 왜 저렇게 붉은 색입니까. 뭐 조명탄을 쏘아올려서 적을 모두 소탕하고 있는 중이라는군. 국군이 반격해서 거기까지 왔다는 것을 나도 아는데.”라고 으스대기도 하였다.
서울사람들이 밤마다 쌓아 놓았던 모래자루는 사람이 서서 총을 쏘기에 적당한 높이였다. “시가전을 하면 너무 위험해” 아버지가 걱정을 하셨으나, 유엔군이 들어온 다음에는 거기에 기대어 잠을 자는 군인들의 야영지가 되었다. 아름다운 나의 이모는 작은 꽃을 몇개 꺾어들고 생글거리며 말하였다. “내가 기어이 저 쵸코렛을 얻어오고야 말리라.” 하면서 유엔군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곳으로 갔다. 이모는 꽃을 주고 얻어온 쵸코렛을 한조각씩 우리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얻어온 사람은 더 먹어도 되는거지?”하면서 남은 것을 몽땅 입에 넣고 우리를 보고 웃었다. 우리는 그러한 이모를 마구마구 사랑하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멋쟁이 이모는 전쟁 후에도 우리와 함께 있기도 하고 나를 데리고 영화구경을 가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에 다니러가면 제일 비싼 식당에서 나에게 밥을 사주기도 하였었다. 대학시절에 내가 썼던 시를 읽어드리면, 꿈을 꾸듯 먼 곳을 바라보면서 “흐음, 참 좋다” 하시던 나의 큰 이모가 정말로 시를 좋아하였다고는 생각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모가 들어주시었던 나의 자작시. 그것은 이모가 입에 넣어주던 쵸코렛이며, 함께 보던 영화였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서울까지 이고 왔던 호박이었으며, 사랑하는 이모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의 잔상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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