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미 순회공연으로 ‘한국 알리기’ 한 몫
1948년 8월 신생정부 최초의 미국 유학생
2년간 줄리어드 수학후 귀국하려했으나 6.25로 발 묶여
뉴욕의 1950년 5월5일은 성악가 김자경의 카네기홀 데뷔일이다. 그때까지 카네기홀 공연을 한 한인이 없었으니까 최초라는 기록이 뒤따른다. 김자경이 줄리어드 음악학교로 유학온 것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그달. 미국유학도 신생정부 최초의 기록이다.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해방과 더불어 모교 음악교사로 있던 김자경은 정식으로 국가시험을 치루고 2년간의 풀 스칼라쉽을 얻어 뉴욕에 왔다. 오기전 그는 국내에서 가극 춘희의 주역을 맡아 명성을 얻었을 때였으므로 꿈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의 꿈은 줄리어드를 발판으로 라 스칼라좌의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푼 꿈도 잠시, 뉴욕에서 처음 맛본 경험은 좌절이었다. 당대의 릴리 폰즈 , 탈리아비니등 국제적인 성악가들을 접하고 나서 느낀 것은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날 저녁 그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귀국하거나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한때 세계를 좁게 보았던 그의 교만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좌절을 겪었다. 일생을 통해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그날밤을 새우며 기도에 매달렸던 새벽녁 귀에 들리는 희미한 음성을 따라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성악가로서 대성해 보려던 당초의 뜻을 접고 후진양성을 위한 발성법 연구로 방향을 바꾼 것. 이때부터 10년간 노력끝에 이룬 발성법 연구분야에서 그는 정상의 경지에 다달았다.
줄리어드 2년간의 수학기간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카네기홀 리사이틀 일정이 잡혔다. 1950년 5월5일의 공연에서 그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발간되던 뉴욕헤럴드 트리뷴과 뉴욕타임즈등이 일제히 좋은 평을 실었다. 들뜬 마을 달래고 유럽을 돌아 귀국준비를 하던중 뜻밖에도 한국전쟁의 비보를 접했다. 6.25 사변이었다. 귀국계획을 늦추며 사태를 관망하던 그에게 미국방성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부터 오는 전쟁에 관한 필름을 보고 거기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던 황재경과 함께 한동안 그 작업을 했다. 이승만을 비롯해 채병덕, 정일권, 손원일, 신성모, 윤치영, 장택상, 김석원, 조병옥, 김성수등 국내 주요인사들의 모습이 필름에 자주 나타났다.
전쟁이 터지기전 남편 심형구 화백이 롱아일랜드 소재 아델파이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합류한 후로 부부는 맨하탄 548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아파트에 살면서 조국을 위해 나름대로 무언가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쯤 그의 매니저가 ‘원 월드 앙상블’이라는 음악여행을 제의해 왔다. 5명 그룹으로 된 앙상블은 한국을 알리는데 좋은 기회도 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전역을 순회하는 이 여행에서 김자경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국신문에는 매일같이 한국전쟁에 관한 뉴스가 도배되다 시피 했다. 전사자 소식 외에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아들의 모습, 파리떼가 우글거리는 비위생적인 장면등이 연일 TV화면을 장식했고 한국이란 나라는 호전적인 국가로 매도당할 때였다. 한국전선에 아들과 남편을 보낸 가족들의 안타까움을 달래주는데 음악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출연진 소개에서 한국으로 부
터 온 김자경이라고 인사를 할때는 온 청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환영했다. 음악회가 끝나면 무대 뒤로 우루루 몰려와 한국에 대해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애썼다. 한국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야만국이 아니다. 5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과 전혀 다른 나라다. 그의 음악여행은 민간외교로서의 성과도 좋았거니와 자신을 알리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1955년 로드 아일랜드에서 열린 하계음악제 ‘써머 투어 오페라’에서 리처드 터커를 비롯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수들과 함께 공연, 올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아몬드역, 칼멘의 미카엘라역을 소화했다.
김자경은 10년 뉴욕생활 동안 봉제공장과 보석공장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포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1958년 귀국후 이대 교수를 지내다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1999년 별세한 후로 그의 아들들이 이를 계승하고 있다.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데뷔시절 뉴욕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우측부터 김자경.임길재, 모윤숙, 뒷줄 우로부터 황재경. 심형구(남편) 손원일 제독.
■ 여성교육가 배상명도 한국알리기 일조
미 교육계 시찰차 방미...미국부인회 제안으로 ‘강연 투어’
한국교육 후원자들 모아 재미상명학원재단 설립
한편 이무렵 6.25 동란 발발로 뉴욕에 발이 묶인 여성교육가 배상명도 김자경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미국인들에게 한국 알리기’ 투어를 벌였던 것. 미국 교육계 시찰 명목으로 왔던 배상명은 이기간 선진 미국교육을 섭취하기 위해 미시간대 시카고대등을 거쳐 뉴욕에서 한국전 소식을 들었다. 남편은 납북되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무사히 부산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당분간 미국에 남아 뜻있는 일을 남기고 귀국할 결심을 했다. 이때 미국부인회가 ‘한국을 알리는 강연 투어’를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카네기홀에 있던 스피치 에이전시의 자격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컬럼비아대 티처스 칼리지에 교육학 전공으로 등록하고 퍼블릭 스피치 코스에 들어갔다. 마침 컬럼비아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던 서두수, 오기형, 홍현설등으로 부터 도움을 받았다.
우선 한국어로 강연 원고를 만들면 이들이 영어로 원고를 다듬어 주었다.
그 강연문을 레코드 판에 녹음해서 목소리의 억양을 다듬었다. 외우고 쓰고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발음 연습을 게속해 결국 강연시험에 패스했다. 때마침 미국을 방문중이던 김동성 공보처장이 한국 여걸이 나왔다며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강연은 각도시, 각학교로 부터 시작됐다. 먼저 여러주, 군, 도시마다 학교에 강연 안내 편지를 띠우면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강연료는 지역과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중고등학교는 40달러, 교회는 20달러, 때에 따라 신자들의 헌금을 모두 받게 되면 1백달러가 훨씬 넘는 곳도 있었다. 대학 강연은 일률적으로 1백달러를 받았다. 생활방편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릴수 있다는데 보람을 느꼈다.
이를 통해 코리아를 처음 알게된 미국인들도 많았다. 특히 아들이나 남편을 한국전선에 보낸 수많은 미국인들은 자식들의 안위와 홤께 그들이 도대체 어떤 나라에서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강연은 미국내 각신문에 한국의 여성교육가라는 타이틀로 한복을 입은 사진과 함께 크게 소개됐다. 강연을 통해 모은 돈은 부산의 가족과 상명학교로 송금돼 학교운영에 보탬이 되었다. 강연을 통해 많은 인사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교육계, 종교계 인사들을 깊이 사귀게 됐다. 배상명은 이들 가까운 후원자들을 묶어 상명학원을 돕는 계기로 삼았다. 전쟁으로 상처입은 한국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동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배상명의 뜻에 따라 동참한 1백여명의 회원 이름으로 재미 상명학원재단(The American Foundation for the Sang Myung Schoool Korea, Inc)을 설립했다. 재단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대학교 월터 랭삼 총장을 명예이사장으로, 한국 YMCA 창설자 조지 피치 박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재미동포로는 서두수 박사, 주영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남궁염 뉴욕총영사, 임병직 유엔대사등이 도움이 되었고 뉴욕의 거부 이원순, 강한모 부부등이 모금에 참여했다. 1953년 1월 미국정부로 부터 비영리단체로 정식 인가를 받아 한국 최초의 국제재단이 뉴욕에 설립되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지
속되지 못했다. 학교 단독으로 미국에 재단을 둘수없다는 이유였다. 뜻을 이루지 못한 배상명은 이듬해 귀국할때 모금액으로 그랜드 피아노 7대를 구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상명은 현재 재학생 1만3천명의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필자는 지난 2007년 5월 개교 70주년을 맞은 상명대 초청으로 ‘1950년대 배상명, 김자경등이 뉴욕에서 펼친 애국운동과 상명학원 미국재단’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1950년도 한복입은 배상명을 소개한 미국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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