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수염은 왼쪽에서 바른쪽으로 빈틈없이 열결된 멋진 구레나룻이다. 전기면도기가 나오기 전에는 남자들이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한 다음에 반드시 면도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평소에는 반으로 접어두는 면도기를 열고 벽에 걸어둔 가죽띠에다 면도날을 쓰윽쓰윽 몇 번씩 문지른 다음, 손님의 수염을 깎는 이발소 아저씨의 솜씨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수염을 기르기도 하셨다. ‘스탈린’의 콧수염처럼 왁스를 바르고 양쪽 끝을 뾰족하게 위로 올리기도 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수염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카이제르수염을 제법 오랫동안 달고 다니시었다.
수염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두기도 했다는 관운장의 수염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미렴공’이라는 칭호를 받았을 것인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멋있는 수염의 주인공은 아마도 링컨 대통령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아있는 수염은 6.25 전쟁중에 덥수룩하게 길러져있던 아버지의 무성한 수염이다. 3개월을 숨어지내는 동안에 아버지는 한번도 면도를 하시지 않고 그냥 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무성하게 자란 수염속에 당신의 얼굴을 감추어 두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이지 그 때에는 수염 따위에 신경을 쓸 형편이 아니기는 했다.
그 무성하였던 수염이 곤란한 지경에서 아버지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서울이 다시 탈환이 되었을 때에 아버지는 삼선교에 있던 스튜디오가 궁금하다고 살펴보러 가셨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아버지에게 다녀 오너라.” 나는 걸어서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학교 앞을 지나서 아버지의 스튜디오 앞에 도착을 하니, 아버지는 군용트럭의 뒤에 마악 실려가시기 전이었다. 한 발을 트럭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나를 불렀다. “빨리 엄마에게 가서 아버지는 헌병대에 잡혀가고 있다고 말하거라.” 나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갔다.
혜화동에 오니 아주머니 셋이 앉아 찰수수로 만든 가루를 둥그렇게 부쳐서 안에다는 팥을 넣고 반으로 접어서 수수떡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을 것만 같은 그 떡을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그러나 나는 빨리 엄마에게 달려가서 아버지의 급박한 소식을 알려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띈 몸인 것이다. 숨이 차도록 뛰다가 걷다가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는 금방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헌병대에 끌려가신 이유는 국군이 들어온 후에도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의 벽에 공산당의 선전물이 아직도 붙어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헌병대장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단다. “당신의 수염을 보니 숨어있다가 오늘에야 밖에 나온 것을 믿겠소.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멋도 없이 무성하기만 하였던 아버지의 수염이 타당하고 이유가 있는 변명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큰 아들의 수염이 더 멋지게 숫도 많아서 부럽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한국남성들이 수염을 기르지 않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옛날에는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한복에 갓을 쓴 모습이 잘 어우러져서 보기에 좋았으나, 양복을 입는 요즈음에는 콧수염이나 염소수염을 기르는 것이 대세인 듯 하였다. 수염기르기에도 유행이 있는가 보다. 아버지 시대의 스타일이 이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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