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엄수…8월처럼 불태운 삶 떠나보내
서울광장 시민들 “그와 함께 이시대 살아서 행복” 눈물 배웅
다리가 아파서, 발이 부어서 이젠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던 그가 저 먼 곳으로 갔다. 갈수록 손발이 차가워지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한올 한올 뜬 흰색 벙어리장갑과 밤색 양말이 그의 먼 길에 동행했다.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 평화가 절룩거릴 때마다 그의 발이 되어 뚜벅뚜벅 걷게 했던 ‘지팡이’도 없이 어디로 그렇게 혼자 떠나가는가, 이날만은 ‘처서’도 서글픈 듯 열기를 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이 서거 엿새 만인 23일 국회에서 열렸다.
그를 모셨던 사람도, 존경했던 사람도, 그와 평생을 경쟁했던 이도, 그를 죽이려 했던 사람까지도…. 이 시간 동안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를 애도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국장으로 치러진 김 전대통령의 영결식에는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벌써 당신이 그립다”는 추도사는 그를 쉬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우리와 정말 영영 이별하시는 것인가요? 갈라진 남과 북의 산하가 흐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나라의 큰일이 나면 어디로 달려가야 합니까?”
물어도 대답 없으나, 거리에 나온 수많은 시민이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는 지나가는 영정을 향해 손을 뻗으며 “김대중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가지 마세요” “감사합니다”라며 보내기 싫은 배웅을 했고, 누구는 그가 숨이 멎는 순간까지 피맺힌 심정으로 걱정하고 염원했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종이에 적어 흔들었다.
영결식뒤 국회를 빠져나온 그는 동교동 자택에 들러 정원에 날아든 새를 보았던 거실과 2층 서재, 신장을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끝까지 고통 속에 투석을 받았던 치료실 등을 둘러봤다. 그는 평소 “이웃 사랑이 인생의 핵심”이라고 얘기해줬던 손자의 가슴에 안겨 아내와 함께 가꿨던 앞마당의 꽃향기도 맡았다.
시청앞 서울광장엔 수만의 시민이 모였다. “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행복했다”는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같이 부르며 그를 맞이했다. 시민들 앞에 선 부인 이희호씨는 남편을 대신해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했다. 이희호씨는 가녀렸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고, 권력의 회유와 압박이 있었으나 한번도 굴하지 않았다”며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 남편이 남긴 유지”라고 말했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보고 싶다는 국민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는 그를 기리며 노란 풍선들이 하늘로 올랐고, 시민들이 띄운 나비가 그 풍선을 좇아 나풀거리며 날았다.
그가 마지막 지나가는 길목마다 수많은 인파들이 눈물로 배웅했다.
독재에 맞선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를 앞당긴 대통령으로, 평화와 인권을 지킨 큰 지도자로 살아오며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어섰던 그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인동초’같은 85년간의 생을 뉘었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우리에게 ‘행동하는 양심’으로 깨어 있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했어요”라는 아내의 편지를 품에 안고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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