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호사(豪奢)중 하나는 여행인 듯 싶다. 여행은 나이든 지금도 내게 여유의 소산이 아니오, 짬짬이 무리를 무릅쓴 객기에 가깝다. 허나 떠나보면 삶에 낀 권태를 벗겨낼 수 있어서 좋고, 더 큰 수확은 내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됨이다.
떠나봐야 일터와 식솔들이 생명줄임을 느끼게된다. 게다가 여행 후에 누리는 호사도 크다. 바쁜 하루의 틈새에서 문득 떠오르는 잔상(殘像)을 음미하는 기쁨이다. 그 잔상들은 무성영화의 장면처럼 돌출적이고 단발적이다. 예컨대,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란 노래를 듣다가 문득 짤즈부르크에서 본 모차르트의 사진첩이 생각나는 식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시달리다가 언뜻 파리의 메트로에서 꽃을 든 소녀가 보이고, 삼겹살을 굽다가 뮌헨의 황태자가 부르던 멋진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오늘 같은 화창한 날도 마찬가지다.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오르다가 설핏 리스본의 쪽빛 하늘과 일곱 구릉이 떠올랐다. 알파마 구역의 골목에서 올려다본 공동주택에 걸린 원색의 빨래들이 그리움의 깃발처럼 펄럭이고, 땅 끝 마을 로카곶의 절벽끝에서 새철럼 훌쩍 비상하고팠던 충동이 되살아났다.
사실 작년 이맘때쯤, 이베리아 반도를 다녀올 때만해도 금방 글로 옮길 계획이었다. 허나 묵혀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아마 삼년 전, 동유럽에서 받은 자연과 예술의 조화미의 충격을 아직도 채 삭이지 못한 게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내심 더 큰 이유는 이베리아의 색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짧은 식견때문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아프리카이다’라고 나폴레옹이 단정했지만, 나도 전통유럽과는 다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화권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허나 수수께끼들이 풀리지 않았다. 한때 잔인하게 원주민들을 몰살하며 식민지를 정복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율배반적인 카톨릭 미션과 노예 식민주의는 어떻게 공존했으며, 이슬람과의 갈등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하는 등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리스본 행 루프트한자를 탔다. 어릴 때, 루프트한자란 말만 들어도 가슴뛰던 세계굴지의 비행사가 이젠 아니다. 아내도 씁슬해한다. “하늘아래 영원한 게 없나봐요. 이젠 한국기보다 후진 게 쇠락해가는 유럽의 모습을 닮은 듯 해요.”
그러나 우리는 모처럼 맞은 호사의 기회를 마음껏 누리기로 작정했다. 리스본과 성지 파티마를 본 다음, 스페인으로 입성할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투우장에서 마타도르의 투지에 붉은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할 것이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의 궁전 분수가에선 집시가 타는 기타소리에도 취해 볼 것이다. 라만차 콘수에그라 언덕에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동키호테 일당과도 조우할 것이다.
새벽 비행기가 리스본항을 선회하며 내린다. 엣 탐험의 최고 전초지로 분주했을 항구는 선잠을 덜 깬 듯 몽롱한 안개속에 누어있다. 지금은 여느 지중해안 항구들 처럼 주황색 기와집들이 즐비한 소박한 도시로 보인다. 한 나절을 보내면서, 옛날 미개지를 향해 배를 타고 나갔던 정복군들은 다 떠난 게 확인되었다. 밤에 들린 카페에선 떠난 남편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노래소리만 애잔하다. 누군가 국민여가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부르는 유명한 파두(Fado)라고 귀뜸해 준다.
스페인하면 태양이 떠 오르지만, 리스본하면 자꾸 달이 연상되는 이유가 여기있는지도 모른다. 리스본의 달은 맑으면서도 애처롭다. 내일은 옛 포르투갈의 영광을 찾아 나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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