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떠나 가톨릭 성지 파티마에 도착했다. 천국만큼이나 먼 줄 알았던 파티마가 이렇게 지척임이 믿어지지 않는다. 파티마는 사랑하는 옛 친구부부 프랑크와 프란시스의 마지막 순례지였다.
30여 년 전 나는 갓 대학원을 마치고 첫 직장을 와이오밍 주 환경청에 잡았다. 인구 불과 5만 남짓한 주도 샤이엔은 옛 서부개척의 전초기지. 새댁아내와 갓 돌 지난 아들을 안고 생면부지인 소도시로 향했다. 서울토박이인 우리가 이런 오지에서 살 수 있을까 낙담스러웠다.
그때 프랑크 부부를 만났다. 직장 고참 상사로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형제처럼 환대해 주었다. 두 분 다 독일계 부친과 버마계 모친을 둔 혼혈 가족이었다. 주말이면 카레감자로 만든 만두요리를 푸짐히 해 오곤 했다. 그들의 정이 없었으면 우린 그 외로운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몇 해 지난 어느 날, 프랑크 부부가 포르투갈의 성지 파티마로 순례 간다고 했다. 프란시스가 평소 아픈 줄은 알았지만 말기 암 환자인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젊어서 철이 없었던 우리는 프랑크 가정의 아픔에 그제야 눈을 떴다. 늘 웃는 얼굴로 남들을 돕기만 해서 행복한 줄만 알았던 그 부부가 마지막 떠나는 길이었다. 우리는 프란시스를 끌어안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9월의 파티마는 눈부시게 화창했다. 30여 년 전, 프란시스가 왔을 때도 이렇게 하늘이 열린 창처럼 맑고 투명했을까. 1917년 동정녀 마리아가 세 어린 목동들에게 나타나 하늘의 비밀을 보이신 곳이다. 그 비밀은 죄와 불순종에 대한 경고와 신자들에게 생명과 믿음을 주는 희망의 메시지로 알려져 있다.
프란시스는 파티마에서 돌아온 얼마 후 하늘나라도 갔다. 평온히 떠났다. 혼자된 프랑크와는 우리가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후에도 절기 때마다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여전히 우리 걱정만 했다.
파티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일행은 땅 끝 마을에 들렸다. 로까 곶(까보 다 로까)이란 마을로 유럽대륙이 끝나고 대서양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문득 옛날 프랑크의 고백이 생각났다. 비록 아내가 파티마에서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진 못했지만 하늘의 희망을 안고 떠났다고 했다. 기쁘게 그녀를 보낸 이유라고 말했었다.
프랑크는 금실 좋은 부부답게 몇 년 전 아내 곁으로 갔다. 그도 아마 어깨 죽지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갔으리라. 체념적인 운명론은 희망을 못 본 자들만이 부르는 비가일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바다로 보낸 여인들이 파두(Fado)라는 운명의 노래를 지금도 구슬프게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친구 프랑크 부부가 떠나면서 보여준 것은 땅 끝의 체념이 아니라 하늘의 희망이었다. 파티마의 기적은 오늘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김희봉 /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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