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기초 닦고 딸은 당당히 꽃피워
▶ 이찬용 전 문화원장, LA.뉴욕서 문화 외교관 활동
외교관을 동경하거나 부러워한 적은 없지만 외교관 자녀들을 부러워 한 적은 있다. 첫 번째는 일반 학생들은 밤새 공부해 겨우겨우 일류 대학에 들어갈 때, 소위 ‘정원외’라는 명목으로 외교관 자녀들이 무시험으로 특별 입학을 하는 것을 알았을 때다.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그들을 경원시하는 ‘일반’ 학생들도 많았고, 웬지 토종 학생들과 분위기가 다른 그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진정 부럽다고 느낀 것은 이중 한명의 여학생과 친해지고 나서이다. 그 학생은 입학 시험을 봤어도 나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받았을 실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기자는 상상도 못할 다양한 경험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기자가 당시까지 아직 외국에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반면, 외국에서 태어난 그는 7개국이 넘는 곳에서 생활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유일한 한인 큐레이터 이소영씨를 이영희 박물관 5주년 특강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학시절 그 여학생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소영씨는 외국에서 태어나 5개국이 넘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한국의 석학 이상으로 정확하고 높은 수준의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아마도 이씨의 아버지가 해외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활동에 전념했던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문화원이 30주년 기념 원고들을 준비하면서 전 문화원장이었던 이찬용씨와 그의 딸인 이소영 큐레이터의 스토리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이 글은 딸인 이소영 큐레이터가 이찬용 전 원장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특이한 ‘부녀대담’형식을 띄고 있다.이씨의 아버지 이찬용씨는 평생 외교관 생활을 한 정통 관료였고 87년부터 90년까지 뉴욕한국문화원장에 재직했다. 96년부터 98년까지는 아리랑 TV의 사장을 역임했다. 이씨는 자카르타에서 태어나 영국과 스웨덴 등 각지에서 어린 세월을 보낸 전형적인 글로벌 키드였다. 1985년 여름 이 전원장이 LA 문화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미국에 왔고 이후 뉴욕에 와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친 후 메트에서 2003년부터 일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80년부터 84년까지 전 미국을 순회하는 ‘한국 미술 5,000년전’ 개최 등 80년대 이후 본격적인 한국 문화 알리기 사업을 실시했다. 이찬용 원장은 바로 그 시기에 LA와 뉴욕에서 문화원장을 맡으며 한국문화 홍보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1998년 메트 뮤지엄에 최초의 한국 상설관 설치라는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씨가 기획해 올해 6월까지 열린 메트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한국 특별전 ‘Art of the Korean Renaissance, 1400-1600’은 주류 미술계와 언론으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외교관 신분의 아버지가 기초를 닦은 한국 문화 사업을 이제는 그 딸이 주류 문화 단체의 일원으로서 훌륭하고 당당하게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문화에 관한 깊이 있는 질문과 대답이 오간 이찬용 전 원장과 이소영 큐레이터의 대담 내용은 11월 정식 발행될 ‘뉴욕한국문화원 30년 기념집’에 영문으로 실린다. <박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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