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레벤트리트 국제경연대회 주커맨과 공동우승
70년 2월 링컨센터 앨리스 털리홀서 첫 뉴욕 독주회
이후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 협연 유럽까지 명성

1967년. 바이얼린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에드가 레벤트리트 국제경연대회 27년 역사에 이변이 생겼다. 이트작 펄먼이 우승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대회에서 처음으로 공동 우승이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우승자는 핀커스 주커맨과 정경화. 당초부터 주커맨의 우승은 점쳐졌던 것이고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이던 대회였다. 그런데 정경화가 결선까지 끈질기에 따라 올라와 결국은 공동 1위를 차지하게 된것이다. 처음 정경화가 이 콩쿨에 나가기로 결심할때 주위에서는 단념하라는 설득까지 있었다. 매니저 까지도 만약에 우승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커리어를 해치는 결과가 될것이라며 염려했다. 스승인 이반 갈라마인 교수 역시 그의 출전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또다른 제자 주커맨이 같은 컴피티션에 참가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주커맨은 파워풀한 아이작 스턴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통큰 정경화의 어머니가 승부수를 먼저 던졌다. 경연을 앞두고 한국에 있는 집을 팔아 딸에게 이태리제 최고의 스트라디배리어스 바이얼린을 사주었다.
경연대회가 마지막 스테이지에 올랐을때 심사위원들은 긴장했다. 결선에서 마주친 두 경쟁자 정경화와 주커맨 사이에 우승자를 가려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장 아이작 스턴은 둘에게 재연주를 요구했다. 재차 연주가 끝났을 때도 심사위원들은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드디어 레벤트리트 역사상 최초로 공동우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과 주커맨을 공동 1등으로. 그와같은 결과는 당시에 대단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떤 해는 우승자를 내지 않았던 레벤트리트 대회가 높은 기준을 택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이들에게 시카고 심포니와 뉴욕필하모닉등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여기서 좋은 평판을 얻음으로서 이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점칠수 있었다. 레벤트리트에 출전하기 전 정경화는 늘 차이콥스키 경연대회에 나가길 꿈꿨다. 그 유명한 국제대회에서 그간 갈고 닦은 기량을 한번 심사받고 싶었지만 당시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으므로 소련과 한국간 긴장관계 때문에 여권조차 발급받지 못하던 때였다. 대신 레벤트리트의 우승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던 셈이다.
이후로 사방에서 출연교섭이 들어왔으나 그녀는 매시즌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솔로 라시이틀을 골라 45회 정도로 제한했다. 최소한 6개월은 음악공부를 더 해야했고 연주 레퍼터리를 가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무렵 정경화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키로 되어있던 나단 밀스타인에 갑자기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연주 이틀전 통고를 받고 대타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7회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이스라엘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이소식이 고국에 전해지고 일시 귀국했던 정경화는 전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미국에 돌아와서는 대중적 인기가 있던 에드 설리반 쇼예 출연하여 미국인들과도 친근해 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뉴욕 첫 독주회는 70년 2월24일 링컨센터 앨리스 툴리홀에서 열려 동포들을 포함한 청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녀의 세계적인 명성은 1970년 들어 떨치게 된다. 그해 5월 앙드레 플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청연주에 출연하면서 그녀의 화려한 유럽무대가 열렸다. 런던심포니는 리허설을 하면서 마지막 차례로 정경화를 스테이지에 올렸다. 그녀를 아마추어로 생각해 비우호적으로 대했던것. 정경화가 차이콥스키를 택했지만 오케스트라는 갑자기 멘델스존을 연주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정경화는 반사적으로 따라가며 멘델스존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제서야
오케스트라가 존경을 표하면서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본공연에서 그녀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스탠딩 오베이션으로 맞았다.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 동양인 클래식 연주가로서 거의 최초의 인물인 그녀가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런던에서의 성공은 그녀의 커리어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3일 사이 영국내에서 30개 이상의 연주회 예약이 들어왔고 앙드레 프레빈, 런던 심포니와의 극동 연주여행이 이루어진 것도 이때였다.
BBC TV 첫 출연, 데카 레코드사와의 장기취입 계약도 이뤄졌다. 첫 취입에서 차이콥스키 뿐만 아니라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명장 야샤 하이페츠의 것
과 비교가 될만큼 훌륭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와같은 일련의 활동으로 정경화는 영국과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뉴욕과 런던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71년 무렵에는 명 바이얼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의 지도를 받으며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친 깊은 이해를 얻을수 있었다. 음악은 기교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이해하고 나아가서 문학, 철학적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대하던 연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격적인 소양을 기르는데 신경을 썼다. 그녀의 연주는 대
단히 정열적이며 엄격하고도 강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표되었다. 전 음역에 걸친 아름다운 톤, 안정된 테크닉, 정확한 리듬 감각.그리고 곡의 순간순간에 감정을 입혀내는 표현력등이 그의 밑바탕이 되었다. 72년 로린 마젤이 지휘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때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이 끝나자 청중들은 5분동안 기립박수를 보냈으며 이후로 런던및 베를린 필하모닉의 추가 예약, 그리고 마젤이 초청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의 협연도 뒤따랐다. 또한 음반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84년 영국인 다이아몬드 사업가 제프리 리케트와 결혼한 정경화는 슬하에 프레데릭, 유진등 두아들을 낳았다. 2005년9월 손가락 부상을 입은후 공개적인 연주활동은 쉬고 있으나 2007년9월 모교인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스쿨 디비전 교수로 임명받았다.
첼리스트 정명화.지휘자 정명훈과 트리오 활동도
한편 정경화는 첼리스트인 언니 정명화, 지휘자인 남동생 정명훈과 함께 트리오 활동도 벌였다. 74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쿨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피아니스트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동생 정명훈은 이듬해 줄리어드 학생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맡으면서 지휘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런던필 및 프랑스 파리 관현악단 객원지휘자등으로 확고한 발판을 굳힌후 89년 프랑스의 세계적인 오페라단인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음악총감독 겸 상임지휘를 맡으면서 세계정상의 지휘자로 인정받았다.
92년에는 음악을 통한 인류의 화합에 이바지한 공로로 초대 유엔 마약대사로 임명되었고, KBS, 아시아 필하모닉,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등의 음악감독겸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현재는 서울시립교항악단 예슬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첼리스트인 언니 정명화 역시 줄리어드 출신으로 트리오의 맏이 역할을 하면서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 기악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4월 세계무대 데뷔 40주년 기념 독주회를 예술의 전당에서 성대하게 가졌다. 이들 모두가 뉴욕이 길러낸 세계적인 음악가족이다.

정트리오(왼쪽부터 정명화, 정명훈, 정경화)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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