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에는 총으로?
미국이 지상천국이란 말은 얼토당토않다. 실제로는 사람목숨이 파리목숨 같은 지상지옥이다. 연간 1만1,500여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하루 32명, 시간당 1.4명꼴이다. 독자들이 이 칼럼을 끝까지 읽기 전에 어디선가, 누군가가 총에 맞아 죽는다는 얘기다.
지난주 포트 후드 육군기지(텍사스)에서 심리상담 장교인 나딜 하산이 총을 난사해 13명을 살해하고 29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꼭 10년 전 콜럼바인 고교(콜로라도)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사건의 사망자 수와 똑같다. 지난 2007년 4월엔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인학생 조승희가 무차별 총격으로 32명을 살해해 사상 최악의 캠퍼스 대량학살을 기록했다.
지난봄에도 꼭 30일 사이에 뉴욕, 캘리포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 전국에서 무차별 총격사건이 이어지며 모두 57명이 희생됐다. 이라크전의 월간 전사자 수보다 많다.
양반동네인 서북미에도 총성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할로윈 밤 시애틀 경찰관이 순찰차 안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워싱턴주 부지사의 장남(한국에서 입양)이 아버지뻘 동업자의 총에 맞아 다쳤고 동업자는 자살했다. 오리건주 베타니에선 가장이 처자를 사살한 후 자살했고 포틀랜드에서도 30대 남자가 별거부인을 사살한 후 자살했다. 2006년엔 한 회교신자가 시애틀 다운타운의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 여직원 한명이 숨졌다.
때마침 워싱턴 DC 지역에서 지난 2002년 무고한 시민 10명을 사격연습 하듯 연속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타코마 출신 뜨내기 존 앨런 무하마드가 11일 버지니아에서 독극물 주사로 처형되자 미국사회 일각에서 총기규제 강화론이 새삼 고개를 들고 있다.
자고로 정부당국은 총기규제를 완화하려고 안달이다. 연방의회는 지난봄 국립공원에 총기를 갖고 들어갈 수 있도록 법안을 통과시켰다. 테네시에서는 주립공원 안에서, 몬태나에선 호텔이나 임대가옥 안에서 총기를 휴대할 수 있다. 텍사스는 서부영화처럼 술집에서의 총기휴대를,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한 술 더 떠서 학교에서의 총기휴대 자유화를 운위하고 있다. 다행히 시애틀 시정부는 공원 등 관내 시설에서의 총기휴대를 일체 금지하고 있다.
느슨한 총기규제의 배경에는 두말할 것 없이 전국 총기협회(NRA)의 입김이 있다. 연방의회를 대상으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NRA는 “총을 가진 악한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량한 사람이 무장하는 것이다. 경찰치안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들이 스스로 방호할 수 있는 모든 선택권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총이 많을수록 부작용도 많이 따르는 건 상식이다. 미국인들은 국민 1인당 1정에 해당하는 2억1,000여만 정의 각종 총기를 소지하고 있지만 자기보호는커녕 총기에 의한 피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영국보다 39배, 호주보다 13배, 이웃 캐나다보다도 6배나 많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대니얼 웹스터 교수는 요즘도 조승희 사건 규모의 대량학살이 전국에서 매일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뿐이란다.
할로윈 밤 순직한 티모시 브렌튼 경관의 장례식을 TV 실황중계로 보며 필자는 혼란스러웠다. 키 어리나를 수 천명의 정장 경찰관이 메운 가운데 21발의 조포가 발사되는 등 국가원수 장례식을 방불케 했다. 두 시간이나 이어진 장례식 전에도 워싱턴대학에서부터 다운타운까지 도심거리를 막고 수 백대의 경찰차량이 꼬리를 잇는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브렌튼 경관도 연간 1만1,500여 총기 피살자 중 하나일 수 있다. 그가 순직한 건 사실이지만 조승희 같은 악당과 맞서다 피살된 것도 아닌데 영웅대접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엊그제 포트 루이스에서 거행된 아프가니스탄 전사 장병들의 장례식은 훨씬 조촐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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