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작품전을 위해 방문한 한국의 가을은 무척 아름다웠다. 가로를 가득 메우는 노란 은행잎들을 밟으며, 나의 고국이자 모든 게 생경한 거리를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구석구석 재미있었다.
미국에 처음 와서 느꼈던 게 사람 구경을 실컷 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가서도 지하철에 앉아 아가씨들의 구두도 바라보고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표정과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웠고 선뜻 눈에 들어와 차는 한강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냥 일없이 걷는 광화문에 가을비가 내릴 때는 대학 때에 비를 맞으며 쏘다니던 기억으로 행복했다.
스물한 살에 미국에 왔는데 마음은 한국을 떠나올 때의 나이로 살아가는 듯싶다.
교보문고 앞에 ‘공무도하’라는 소설의 광고가 멋있었다. 한국 최초의 시라는 공무도하가는 정말 무척 아름답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여옥의 노래>
어렸을 적에 이 시가 무척 좋아 그 시를 적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이태백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었다. 이태백이 술병을 들고 물에 비친 달을 따라 강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을 그렸으나 불이 나서 그 그림은 타 없어졌다.
빠져 줄을 줄 알면서도 강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예술가의 삶 같아서 그 시를 좋아한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 도착한 곳이 영월이었다. 말로만 듣던 동강의 아름다움. 낙엽이 져서 드러나는 산의 선들이 아득히 아름다웠다. 제천역에서는 가을 국화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아이 얼굴만한 국화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고 새로 나온 온갖 종류의 국화꽃을 보며 새삼 국화의 품위와 사랑스러움이 좋아 한아름 가슴에 안고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가을 기차역에 쓸쓸히 서 있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어디론가 다시 떠날 수 있고, 어디에선가 내가 왔다는 느낌, 그리고 다시 떠나고 싶다는, 어디든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모르는 삶의 장소를 향해 갈 수 있다는, 며칠은 허용된 감상적 시골 여행의 곳곳에서 조상의 백골이 묻히고 얼이 느껴지는 고국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부드럽고 깊은 산천의 풍경에 “나는 너무나 오래, 멀리 있었구나 …”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캘리포니아의 대기와 대지를 사랑하고 거대한 공간에 익숙한 나에게 고국의 산천은 작고 다정하고 청명했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어떤 생기를 느끼게 하는 데 한국인만이 지닌 이 생생한 에너지가 한 100년 지나면 얼마나 더 자연스럽고 멋진 나라를 이룰까를 상상했다.
한 100년 실컷 가져보고 실컷 먹어보고 실컷 써보고 나면 사람들이 그 이상하게 과장된 어떤 껍데기적인 문화를 버리고, 가을 나무처럼 뿌리 깊고 초연한 정신으로 현대와 미래의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월에서는 단종이 유배되어있던,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인 소나무 숲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았고 사진 박물관에서 좋은 사진을 보았다. 곤충 박물관에서는 한국의 나비와 여치, 잠자리들을 보았는데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한 시대의, 거리에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임응식(1921-2002)의 사진(‘구직, 서울 명동, 1953’)은 살아있음의 고뇌와 비애가 절절하고, 인간 존재의 쓸쓸함과 헐벗음이 그대로 전해와 가슴이 찡했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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