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술하는 친구가 존재(Exist)와 출구(Exit)에 관해 정의를 내린 적이 있었다. 곧 인생에서 존재(Exist)란 출구(Exit) 를 찾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철인의 사상인지 아니면 강의실에서 들은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참 그럴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너는 출구를 찾았느냐고. 친구왈, 자신은 냄새를 잘 맡지 못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네가 개냐? 냄새하고 출구하고 연관짓게. 친구 왈, 모르시는 말씀. 삶은 냄새를 얼마나 잘 맡느냐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냄새? 친구가 말하는 냄새란 무엇일까? 아마 예술적 재능, 직관력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산다는 문제 또한 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냄새를 존재(Exist)의 문제와 연결지은 것은 참으로 예술가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냄새는 동물적인 직감을 말한다. 누구나 맡을 수 있지만 또 맡을 수 없는 것이 냄새의 본능이다. 현자가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따로 있고 범인들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따로 있다. 삶에서 우리가 방황하는 것도 바로 이 냄새 때문이 아닐까? 삶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지만 그 어떤 황홀한 냄새를 맡고 그 본질을 찾아 방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은 누구나 방황하는 시기다. 이성문제, 물질이나 출세의 문제 또 크게는 구도의 문제를 놓고 방황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미학적인 문제가 가장 강렬하다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란 결국 아름다움을 찾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세상 속에 뒤엉켜 방황하는 것도, 세상을 버리고 구도를 추구하는 것도 결국 각자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방황은 죽고사는 문제가 달릴만큼 절실한 문제였다. 베르테르(혹은 그것이 괴테 자신이었는지는 모르지만)가 죽음과 맞바꿀만큼 느꼈던 아름다움은 무엇이었을까?
베르테르의 이야기는 좀 문학적 과장이 섞인 것이겠지만 아무튼 무언가 크게 방황하는 사람에게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미학적인 방황이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방랑하는 화란인’이라는 작품(오페라)을 보고 있노라면 섬뜩한 실존으로 전율하게 되곤한다. 저주를 받아 바다를 영원히 표류한다는 네델란드(화란)인이 7년만에 부두에 내려 쏟아내는 독백은 참으로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이 죽을 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저주받은 영혼은 세상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찾아야만 저주를 풀 수 있는 데 황당한 내용은 차치하고, 화란인을 묘사한 그 창백한 음악이야말로 참으로 강렬한 남성이 느껴지는 방랑의 진수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은 폭풍우 밖에 찾아 볼 수 없는 바다에서 영원히 표류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죽을 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그 고독한 영혼에 대한 공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삶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없는 사람이리라. 바그너의 작품이 황당무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방랑(구도)적 성찰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젊은 시절 바그너(의 음악)를 듣고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니체뿐만아니라 전 독일 예술계로 완전히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자는 괴테도 베토벤도 아닌 바로 바그너였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바그너야말로 이 냄새를 잘 맡았던 천재적 본능을 갖춘 작곡가였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그 누구보다도 방황의 종착역, 즉 존재와 출구의 문제를 정확하게 갈파했던 예술가였다. 그는 예술(특히 음악)을 통해 구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공연시간만 16시간이 넘는 (오페라)작품을 참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지구상에서는 그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기쁨을 줄 수 있을 뿐만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도의 출구가 될 것을 확신했다.
이 과대망상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작품과 투쟁했고 그 승리의 전리품으로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무릎꿇게 했고 황제와 귀족들까지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주물렀다. 자신의 예술만을 위한 성지 바이로이트에 큰 오페라 극장을 짓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도 아낌없는 정열을 바쳤으며 오로지 예술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한마디로 정말 예술에 미친 저주 받은 방랑하는 화란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늘 길었지만 그 속에 나타난 사상은 간단했다. 즉 ‘사랑과 구원’ 이 그것이었다. 즉 누구나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을 얻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있다. 그의 도덕적인 가치관이 담긴 음악에 전유럽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배금사상과도 맞물린 ‘루벨링겐의 반지’ 등은 나중에 반 유대주의에 앞장, 본의 아니게 히틀러 등에게 이용당하며 유태인 핍박의 선봉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바그너는 1839년 파리로 가는 도중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했던 체험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하는 화란인’을 작곡했다고 한다. 내용은 하이네의 소설을 각색했으며 순수한 사랑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을 떠난 바그너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남의 부인을 빼앗아 줄행랑을 치고, 빚을 떼어 먹고 도망치는 등 예술에만 미쳐있던 바그너는 작품 활동외에 다른 것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이중 인격자였던 바그너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내려놓고, 그의 장점만을 말하자면 그는 적어도 예술가로서는 진정한 방랑하는 화란인이었다는 점이다. 예술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은 녹여버리는 순교자적인(?) 자세. 도전과 모험, 방랑하는 혼이 없는 예술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진정한 힘이란 권력과 지식이 아니라 폭풍우를 예감하고도 과감하게 닻을 올리는 용기다. 당신은 정말 가슴 아프도록 가고 싶은 그 곳, 파라다이스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까? ‘방랑하는 화란인’이 주는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오는 6월부터 시작되는 바그너의 ‘루벨링겐의 반지’(2부 발퀴레, 내년 6월에는 전작품이 공연됨)를 통해 우리들의 인생표류, 방랑을 한번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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