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넘기는 마감은 일요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주일 전 감정의 기록인 셈이다.
조금 전, 김연아의 올림픽 경기를 보았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감당하기 어려운 지독한 스트레스였을 텐데. 김연아의 무대가 끝나고 NBC해설자도 같이 그 짐을 내려 놓았다. 김연아의 눈물에 안쓰러움을 실어 말했다. 마음의 짐을 놓기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김연아의 무대를 보며 ‘자재’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걸림이 없었다. 음악과 함께 온 몸이 호흡에 묻어 실려갔다. 온갖 묘기도 사뿐히 가벼웠다. 가장 최고의 ‘묘’를 보여줬다. 누구나 함께 따라 할 수 있을 듯 쉬워 보였다.
김연아의 쉬워 보이는 무대의 배경은 ‘내려 놓기’라고 생각한다.
연이어 무대에 올라 온 아사다 마오는 강렬한 붉은 색의 의상과 긴장을 놓아주지 않는 음악으로 몰아쳤다. 이기고 싶다는, 이겨야 한다는 올림픽 정신다운 투지를 심어 놓았다. 그래서 힘들었다. 음악이 끝나기 전에 보는 이가 먼저 지쳤다. 선수도 불붙은 쇠가 되었다. 그러나, 담금질의 끝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강도를 못 견디고 튕겨져 나간 쇳조각처럼 이가 빠져버린 것이다.
김연아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가 오고 같을 거다. 의상의 색깔, 음악, 템포, 하다못해 옷에 붙은 구슬의 개수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김연아 팀에 감탄했다. 다들 내려 놓았다. 금메달도 내려 놓고, 입술연지 색도 내려 놓고, 모두 한 마음으로 평상심을 선택했다. 조화로움의 시작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김연아도 내려 놓았다. 얼음에 몸을 기댔고, 음악에 실어 그 순간 순간에 살아있었다. 김연아 let go의 배경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기’다.
샌프란시스코 젠센타의 스님이 미국에 선불교를 일으킨 스즈키 선사의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부엌일을 하던 스님한테 스즈키선사가 말했다. “무를 썰 때는 칼이 되고, 국을 저을 때는 국자가 되라” 12년 전 처음 현각스님을 만났을 때,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들려 주었다. ‘오직 할 뿐’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다림질 할 때도 ‘오직 다림질 할 뿐’이라고 했다.
모두들 많이 지고 간다. 그 짐을 내려 놓고 나를 지킬 수 있는 길, 그래서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길은 오직 ‘할 뿐’이라고 본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자. 연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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