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글렌코브 소재 소련외교관 집단거주지에 진입 농성
코리안퍼레이드서 태권도수련생들 소녈 KGB 짓밟는 장면 연출
1983년 8월31일 저녁 뉴욕을 출발,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소속 007 점보제트기가 이튿날인 9월1일 새벽 3시26분 사할린 인접해역 1만킬로미터 상공에서 소련전투기 수호이 15기가 발사한 2발의 공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돼 269명의 승객및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전세계를 놀라게 만든 이사건은 당시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간 존재했던 냉전의 희생물로 자유진영의 거센 항의를 불러왔다.
사건 발생 직후 한국정부는 소련을 맹렬히 규탄했으며 일반 국민들도 소련의 이같은 만행에 전국적인 규탄시위를 벌였다. 뉴욕 한인사회에서도 이를 묵과할수 없다며 울분이 터져나와 사건 직후 유엔본부앞 하마슐드 광장에서 대규모 규탄대회, 합동 추모예배, 평화행진, 대학생 촛불데모등이 잇따랐고 뉴욕항에 입항하는 소련화물선 입항금지등 각종 규탄대회가 열렸다. 당시 뉴욕한인회 주최로 규탄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분을 삭이지 못한 2백여명의 한인들이 롱아일랜드 글렌코브에 있는 소련 외교관 집단 거주지에 진입해 소련기를 불태우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강익조 뉴욕한인회장은 어느 미국인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던 소련인 거주지에 들어갈때 지역경찰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련 컴플렉스를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철문을 1백여명이 힘을 합쳐 밀자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단지에 난입한 시위자들은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 1시간 가량 농성을 벌이다 퇴각했다. 경찰이 이를 막았으나 시위가 워낙 거세었고 미국인들도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강경진압은 하지 못했다.
이때 일부 시위대가 기물을 부수려 했으나 강회장은 이를 목이 쉬도록 적극 말렸다고 했다. 시위가 과격해지면 규탄하는 의미가 희석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제가 필요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대신 시위대는 단지 마당에서 소련기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올렸다. 그때 소련기에 불을 붙였던 김대현(당시 미주상공인총연합회장)은 단지내 관저가 웅장하고 좋았는데 시위대가 들어가자 소련인 거주자들은 모두 집안으로 숨어버려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의 시위는 다음날 미국의 주요언론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참사 희생자 중에는 현직 미하원 의원도 있었고 뉴욕거주 한인 의사등 전문직,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던 인재등이 탑승하고 있었다. 또한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 거주하던 태권도 사범 빌리 홍이 포함돼 있어 미전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태권도인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는 특히 프로 골퍼로서의 자질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참사 한달후인 10월1일 브로드웨이에서 열린 제4회 코리언 퍼레이드에서 태권도복 차림으로 참가했던 대뉴욕지구 태권도협회 산하 250여 수련생들이 희생자들의 주검을 애도하는 관을 메고 행진을 했으며 태권도 시범의 일환으로 소련의 KGB(비밀경찰 허수아비를 발로차 길바닥에 쓰러뜨리고 이를 짓밟아 뭉개는 통쾌한 장면을 연출하여 연도의 관중들로부터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이장면은 다음날 뉴욕 일간지 Daily News의 조간 표지 전면에 사진과 기사로 실려 동포들의 울분을 달래주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각국으로 부터 항의에 직면한 소련은 이 여객기가 미국의 스파이 임무를 띠고 비행중이었다고 주장했다. 비행기가 실종된후 소련이 상황발표를 하기 까지는 거의 1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사고여객기는 실종 당시 8월31일 밤 9시58분 케네디 공항을 출발하여 앵커리지에서 급유를 받고 서울로 가던중이었다. 소련은 9월6일에야 이례적으로 장시간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 소련군 장교들은 조종사 1명이 이 항공기의 비행을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받은바 있다고 밝히고 그 이유는 이 비행기가 시계가 좋지않은 한밤중에 운항허가도 없는 소련의 재한영공을 비행하고 있었고 여러번의 신호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소련은 이 민간 여객기가 스파이 임무를 띠고 있었으며 비극적인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고 떠넘겼다. 소련이 기자회견을 주최한 이유는 미국이 KAL기를 격추시킨 소련 조종사의 목소리로 판명된 테이프를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테이프 속의 조종사는 지금 목표물에 접근중이다. 미사일을 발사해 목표물이 파괴됐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심각한 냉전상태에 있었다. 미국은 보수적인 레이건 대통령이 새로 취임했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양국은 사할린 상공에서도 치열한 첩보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인해 KAL기 사건은 여러가지 음모론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쨌든 이사건은 레이건 정부에게 뜻하지 않은 호재를 안겨준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그때 막 미사일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정부는 유럽내 핵무기 배치등을 포함한 국방예산이 삭감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KAL기 사건이 터지면서 조성된 강경여론이 의회의 반대를 무력화시킬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니카라과 정부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 지원금도 KAL기 격추사건 덕분에 통과될수 있었고 미해병대의 레바논 파병도 어렵지 않게 승인되었다. 수세에 몰렸던 레이건의 정치위기를 KAL기 사건이 되살린 셈이었다.
글렌코브 소련인 거주지에 진입해 소련기를 불태우며 규탄시위를 벌였던
한인들. 오른쪽 김대현씨가 소련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해 코리언 퍼레이드에 참가한 태권도 수련생들이 소련 KGB 허수아비를공격하고 있다.
운항미숙으로 소련영공 진입
유도착륙 무시, 격추 명열...10년후 블랙박스 공개
훨씬 후 비밀이 해제되면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요격기의 조종사는 겐나디 오시포비치로 밝혀졌다. 사건당시 그는 관제소로 부터 KAL기를 국제관례에 따라 유도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여객기에 3백미터까지 접근, KAL 007기와 같은 고도로 날아가면서 전투기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유도착륙 신호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KAL기는 비행을 계속했으며 조명탄을 4차례 발사했는데도 여객기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도를 높이
자 관제소로 부터 격추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대해 해명해야할 KAL기측 기장이나 승무원들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건은 미궁에 빠진채 27년이 흘러갔다.
사건 10년이 지난 1993년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블랙박스 기록에 따르면 007기는 조종사의 운항미숙으로 예정된 경로를 이탈, 소련영공으로 진입했으며 소련의 대공부대 사령관이 KAL기가 첩보비행을 하고 있다고 판단, 전투기 조종사에게 격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국제민항기구는 KAL기 조종사가 나침반 비행을 한것은 잘못이며 소련은 민항기 식별의무를 게을리 했다고 발표했다.
소련군 대변인 니콜라이 오가르코프가 기자회견에서 사고 비행기에 대한 항로를 가리키며 해명을 하고 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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