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그치자 뒤뜰에 자목련이 활짝 피었다. 목련송이들이 마치 보랏빛 등(燈)처럼 가지마다 꽃불 밝혔다. 그 화사한 빛 때문인지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다. 태가 곱고 품이 넉넉한 목련나무 아래서 이맘때 돌아가신 장모님 생각을 한다. 작은 바람에 자색사이로 설핏 비치는 우윳빛 속 이파리가 당신의 수줍은 덧니 같다.
막 제대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해니 삼십 성상(星霜)도 더 지난 일이다. 후암동 윤씨 댁 따님과 결혼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날. 장모님은 싱싱한 무우를 넣고 고깃국을 한 솥 끓이셨다. 집안 큰 어른이신 할머니와 정성 들여 상을 보시곤 옆에 앉아 놋쇠 국그릇이 비기 무섭게 채워 주셨다. 몇 그릇 비우고 나니 한 말씀하신다. 잘 먹으니 건강해서 좋네. 혼인은 하늘의 뜻이니 이루길 원하면 기도하게.
믿음의 어머니. 아무 것도 없는 햇병아리 같은 나를 배냇신앙이란 말만 듣고 믿어주셨다. 나는 교회문전만 기웃거린 내 실체가 양심에 걸려 먼저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믿기로 작정하신 듯, 갑부 집 청혼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장모님은 평안도 선천에서 갓난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 나오실 때, 코앞이 삼팔선인데도 성수주일 하시느라 넘질 않으셨다고 한다. 삼엄한 삼팔선 아래서 예배를 드리고 다음날 경계를 넘으셨다.
피난 나오셔서 고향사람들과 해방촌 언덕에 터를 잡으셨다. 그리고 벽돌을 찍어 교회당부터 지으셨다. 온유한 현모양처형에 이재엔 밝지 못하셨지만 생활력은 남달리 강하셨다. 피난통에 성격이 불같은 장인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목상을 여셨는데 후한 성품과 철저한 신용으로 크게 번창했다. 주일날 문을 닫는 유일한 점포였는데 단골들은 기다렸다가 다음날 몰려왔다.
장모님은 주위의 어려운 인척과 교인들, 동향민들을 오래 도우셨다. 등록금을 도와줘 훗날 의사나 목사가 된 젊은이들도 여럿 있었다. 동네 행상 할머니들은 매일 팔다 남은 떨이 감을 아예 이 댁에 부려놓고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모님이 푼돈 모아 사 둔 점포나 땅들은 나중에 꽤 든든한 재산이 되었다. 경제통으로 존경받으신 장인어른은 자신의 사업에 실패한 뒤, 평생 흘대만 해왔던 부인에게 비로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신이 나보다 몇 배 낫소.
장모님은 결혼생활도 지혜롭게 사셨다. 신혼 때 유학생활로 고생하던 아내가 “엄마, 좀 나이든 사람에게 시집가서 사랑이나 듬뿍 받을 걸”하고 푸념하자 한마디 하셨다. 내 나이든 남편하고 살아보니까, 남자란 나이 상관없이 부인을 제 엄마처럼 의지하고 살려고만 하더라. 친구 같은 남편이 좋으니라하시며 내 기를 살려주시곤 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장모님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 덕에 더 배우고 미국서 편히 살았지만 그들에 비해 인격도, 신앙도, 삶의 지혜도 훨씬 미흡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당신처럼 역경을 헤쳐나간 믿음도, 어려운 집 자식들의 등록금을 선뜻 내 준 여유도, 고향 분들을 끝까지 돌보는 우애도 없이 살았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장모님을 추모하며 아프리카 고아들을 돕기 시작했다. 벌써 4명으로 늘었다. 그들이 보낸 카드를 보며 무척 행복해한다. 10명을 목표로 세웠다. 어머니를 닮고 싶은 딸자식의 심정을 왜 모르실까.
봄날, 목련나무 아래 서면 보라 빛 치마에 흰 고름 한복 곱게 입고 환히 웃으시던 장모님이 그립다. 나이 들수록 그 후덕하시던 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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