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클린 처치애비뉴 일대서 세차례 집단시위
1970년대 후반쯤 뉴욕일원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한인 상인들과 흑인 고객간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맨하탄 할렘, 퀸즈 저메이카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다가 79년 브루클린 처치애비뉴에서 흑인들의 조직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한인 청과상에 고용된 파트타임 흑인을 해고한 것이 발단이 된 시위는 그해 여름 처치애비뉴 일대에 한인상점 불매운동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한인상가 주변에 ‘코리안 고홈’, ‘보이콧 코리안 머천트’라는 전단이 나붙더니 3주후 점포 앞에서 흑인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지역주민을 고용하라, 악덕상점 주인을 몰아내자등 구호를 외치며 고객들을 못들어가게 막았다. 이시위는 길게 끌지 않았고 지역개발위원회와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끝났지만 한인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씻겨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9년후인 1988년8월27일 브루클린 풀턴애비뉴 1280, 노스트랜드 애비뉴 선상에 있는 트로피캐나 프룻(대표 정우양)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흑인고객 아이비 킹(67세)과 그녀의 딸(23세)이 마른 명태 몇마리를 훔쳤다는 이유로 한인 고용원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지역 흑인들의 시위를 유발하게 된것. 시위대는 해당 점포가 문을 닫을 것과 대표자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이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점포주가 2주간 가게문을 닫았기 때문에 의외로 시위가 번지는 상황을 맞았다. 9월 들어 풀턴지역 아프리카상인번영회가 주도하는 시위대들이 트로피캐나 뿐만 아니라 인근 한인상점 앞에서 10여명씩 동시다발로 연쇄시위를 벌였다.
9월14일 관련단체들로 구성된 사태수습위원회가 발족되고 뉴욕한인 변호사협회(회장 조대영)가 전면에 나섰으나 시위는 멈추지 않고 확대일로를 걸었다. 뉴욕한인회(회장 이문성)도 10월7일 지역, 직능단체장 간담회를 열고 한인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인종분규대책위원회를 별도로 발족시켰다. 이날 회의에는 김기중 청과상조회장등 30여명이 참석하여 수습대책을 논의했다. 초기 대응 미숙으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 됐다, 물건을 훔쳤다면 경찰을 부르는 것이 옳았다는등 자성론이 일기도 했다. 브루클린 한인회는 법적해결을 위해 변호사 비용등 기금을 마련키로 했다.
시위는 브루클린에서 머물지 않고 타지역으로 번져나갔다. 10월17일 브루클린 트로픽, K&M 청과상에 이어 킌즈 저메이카 166가의 J&K 청과상, 할렘 125가의 코코 청과상, 브롱스 화이트 플레인스 로드의 창스 베지터블 청과상등 앞에서도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11월 19일에는 흑인 시위자들의 주요 타겟이었던 K&H 청과상 (511 노스트랜드 애비뉴)의 박난성 부인이 가게앞에서 시위여성에게 뺨을 맞는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박부인이 앰불런스로 인근 인터페이스 메디칼센터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사건으로 인해 시위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무렵 흑인사회와 접촉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었다. 12월5일 브루클린 한인교회에서 한흑분규와 관련 한흑 교회 대표자 세미나가 열려 한흑 목회자 30여명이 참석했다. 이자리에서 한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하고 지역사회 참여가 부족하다는 점등이 지적되었다. 12월20일에는 노스트랜드 상인벙영회 주최로 열린 송년회에 앨버트 밴의원등 흑인정치인, 지역사회 대표, 상인및 지역주민 60여명이 초청됐다. 뉴욕한인회와 지역, 직능단체장들이 대거 참석하여 흑인 대표들과 화합을 위한 서로간의 노력을 다짐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양측 대표자들이 모여 화해협정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7차례에 걸친 모임끝에 6개항의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서 일단 종식되었다.
풀턴 스트릿 레스토레이션 플라자에서 12월21일 오전 11시 유해근 노스트랜드지역 상인번영회장을 비롯한 한인측 대표 6명, 앨버트 밴 뉴욕주 하원의원을 비롯한 7명의 흑인대표들이 참석, ‘상호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자리에는 뉴욕시 인권국장인 잔 브랜든씨와 더글라스 화이트씨가 배석, 합의서에 연대 서명했고 관할 79경찰서 캐롤 서장도 지역유지 대표로 참석해 진행상황을 지켜봤다. 합의서에는 흑인측의 6개 요구사항이 포함됐다. 그 골자는 한인상인들이 흑인계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개사과하고 문제의 점포업주는 더이상 영업을 할수 없다, 한인들은 동지역의 흑인계 은행을 이용할것, 지역개발을 위한 기금을 찬조할것, 흑인 청소년들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할것 등이었다. 이로서 1988년 브루클린 사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뒤 또다른 사태가 불거졌다. 1990년 1월18일 플랫부쉬 한인 청과상 레드애플에서 하이티 출신 팰리세 여인이 물건을 훔치다 종업원과 시비가 붙었다. 이로인해 주인 장봉재씨는 3급폭행 혐의로 입건되고 지역주민들의 항의데모와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는 인근지역 상점으로 급속도로 파급되면서 소니 카슨등을 중심으로 한 흑인 과격 운동단체들이 시위의 전면에 포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흑인여성은 1월20일 장씨를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시위대는 처치애비뉴 선상을 돌며 한인을 배척하는 전단을 돌리고 구호를 합창했다. 20여개가 넘는 이지역 한인 상인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게문을 일찍 닫았다. 식당및 옷가게등 청과상과 무관한 상인들도 덩달아 움직였다.
시위가 격화됨에 따라 뉴욕시경은 유혈사태 예방을 위해 중무장 경찰병력을 5개버러에서 차출, 150여 특별경찰 요원들을 현장에 배치됐다. 시위가 시작된지 4개월 지난 5월2일 브루클린 지방법원은 흑인시위대에게 3개월간 시위 중지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시위는 때를 기다린듯 격화되면서 3백여명의 흑인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에 대비해 시경은 4백여명의 데모진압 경찰을 처치애비뉴 일대에 배치했다. 6월6일 장봉재씨에 대한 재판이 브루클린 지방법원에서 열려 제랄드 헬드 재판장은 팰리세인 여인이 고소한 장봉재씨의 폭행 고소건을 기각.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흑인 인권단체인 코어는 뉴욕시장과 경찰국장을 직무유기로 제소했다. 이때 흑인 과격세력의 불법시위에 7개월째 맞서오던 두가게중 처치플룻(대표 박만호)이 7월30일 갑자기 내부수리를 이유로 잠정휴업에 들어갔다. 법원으로 부터 시위중지라는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미온적인 태도에 따라 시위는 여전히 계속됐고 사상 처음 흑인 시장으로 당선된 데이빗 딘킨스 뉴욕시장 역시 법집행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브루클린 흑인 시위
흑인시위 종식시킨 인종화합 평화대회
딘킨스 시장으로부터 시위중지 결단 얻어내
이때 뉴욕한인회 인권옹호위원회(위원장 변천수)가 시기를 놓지지 않고 인종화합대회를 추진했다. 한인사회 일부에서 현실적으로 해결책이 될수 없다며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변종덕 한인회장과 변천수 위원장등의 강력한 추진과 한인 언론사등의 후원으로 대회가 열릴수 있었다. 1990년 9월18일 뉴욕시청 앞에 한인 1만여명이 모여 시장의 편파적인 처사에 항의하면서 법원의 시위중지 명령을 집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평화시위는 딘킨스 시장을 연단에 세우고 인종간 화합을 주창하도록 유도했으며 결국은 딘킨스 시장으로 부터 시위를 중단하라는 법원명령을 집행하도록 결단을 내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서 1년 이상 끌었던 브루클린 흑인시위는 종식되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인종화합 평화대회를 보도한 뉴욕의 신문기사들, 왼쪽 상단에 평화대회 연단에 앉은 변종덕 회장과 연설하는 변천수 위원장의 사진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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