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비가 내렸어도 봄빛이 완연하다. 며칠 동안 하얀 꽃을 피워내 집을 환하게 만들던 커다란 자두나무는 바람에 꽃들이 쏟아져서 나무 테라스 위에 하얀 눈이 내린 것만 같았었다. 앞뜰에 심겨 있는 수선화와 튜울립이 꽃대궁을 밀어 올리더니 봄처녀처럼 화사한 꽃을 피워내고, 길 가 풀섶에 숨어 있는 작은 들꽃들도 하늘을 향해 수줍게 웃고 있다. 앙상했던 나무가지에도 연두빛 어린 나뭇잎들로 초록물이 오른다. 어느 날은 집 근처를 운전하다 유채꽃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길에서 선명한 노란빛에 홀려 나는 잠시 멈춰 서 있기도 했었다. 세상은 온통 파스텔 빛깔의 향연, 나무와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사랑하는 이여/그대 스란 치마의 물살이/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가는 근심/그도 그런 것인가/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물거품이 한 없이 일고 그리고 한 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아름다운 이여/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박재삼 ‘나무’)
이 시는 봄날의 나무들을 닮아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마른 가지에서 힘겹게 봉우리를 올리고 잎을 피워내는 나무들은 만 번의 사랑을 해도 갈증이 일고 한 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그래서 아프더라도, 그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할 일이 없다고 노래하는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 곁에서 늘 꽃을 피우고 잎사귀를 무성히 달고 있는 사랑을 몰랐던 것은 내 마음의 작은 창문을 열지 않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따뜻한 봄인데 내 안의 슬픔이 물로 녹아 내리지 못하고 아직도 겨울날 얼음처럼 얼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은 딸 아이의 생일이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차창 밖 가로수 나무들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꽃과 분홍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십일 년 전 아름다운 봄 날, 나에게 온 딸아이는 나에게 늘 한송이 예쁜 꽃이었다. 그 여리고 작은 꽃이 바람이 불면 바람에 꽃잎이 다칠까봐, 비가 오면 비에 젖을까봐 마음이 안스럽고는 했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렇게 내 마음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고, 그 나무에 해가 뜨고 달이 걸렸고 바람이 불었다.
가족과 산호세 다운타운에서 ‘Cirque de Soleil’의 OVO 공연을 보고 왔던 밤은 차가운 기운이 다소 누그러진 바람이 불며 가랑비가 내리던 이른 봄이었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커다란 천막 안은 바깥 날씨와는 달리 한바탕 신나는 축제였다. 그 곳에는 꽃들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나비가 있었고, 따뜻하고 축축한 대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딱정벌레들과 하얀 거미줄 위에서 신나게 뛰어 오르는 거미들, 메뚜기의 숨가뿐 팔짝거림이 있었고,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작은 생명들의 삶의 찬가로 가득찼었다.
높은 허공에서 기다란 줄에 의지한 둘이 하나의 눈 맞춤과 호흡, 한마음으로 줄을 타며 서로 사랑하면, 어두운 하늘에는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활짝 피어났었다. 천상의 음악들, 노래와 춤, 그리고 허공에 아름다운 꽃이 걸렸고 반짝거리는 오색빛 종이눈들이 천장에서 쏟아져내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고, 누구를 미워할 일 없이 그저 행복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천국이 이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들이 행복하게 춤추고 노래했던 그 봄 밤, 아마도 그때 부터였던 것 같다. 주어진 날들을 그 날 처럼 기쁘고 가볍게 노래하며 살고 싶어졌던게……정말 그렇게 하루 하루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름다운 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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