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 유대노력, 90년대이후 한흑갈등 사라져
뉴욕에서는 브루클린 흑인시위를 종식시켰던 90년 9월18일 뉴욕시청앞 인종화합 평화대회를 계기로 한흑간 인종갈등이 일단 종식된 것으로 되어있다. 이후로 지역에 따라 흑인 고객들과 작은 충돌은 있었을런지 모르지만 한인상인을 배척하거나 한국상품 불매운동과 같은 집단적인 시위는 자취를 감추었다.
1980 년대 흑인상가에서 맹위를 떨치던 한인 보이코트가 사라진 점에 대해 많은 풀이가 있지만 우선은 한인들이 단체 차원에서 흑인사회와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기울인 것이 결실을 맺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있다. 할렘을 중심으로 활약한 한흑친선협회, 한흑연대와 같은 인종적인 의미를 지닌 명칭의 특수단체들이 생겨나고 그들에 의한 유대노력이 기울여졌다.
또한 각지역 상인번영회와 한인회, 교회등을 통한 한흑간 유대가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세차레나 흑인시위가 벌어졌던 브루클린에서는 브루클린 한인회가 주동이 되어 매년 한미축제를 열고 이 축제에 흑인 정치인, 교계 지도자, 주민등 1천여명을 초대하는 연례행사를 창설했다. 흑인지도자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흑인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다민족 축제, 흑인 지도자들의 한국방문등을 통해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곁들여 졌다. 그와같은 꾸준한 한인사회의
노력으로 흑인 커뮤니티와 좀 더 가까워지는 입장이 됐고 흑인 지역에서 비지니스를 하는 그룹이 흑인 고객과의 마찰을 최소화 하려는 개인적인 노력도 아울러 기울여졌다.
다시말해 흑인사회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한인 상인들에 대한 불만사항을 스스로 개선해 나가는 자체노력이 수반된 것이다. 당시 흑인사회가 지적했던 불만사항들을 열거해 본다면 한인들은 그들 지역에서 돈만 벌어갈뿐 전혀 지역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역은행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영어와 미국관습을 배우려 하지 않고 현지 흑인들을 고용하는 데도 인색하다. 일반적으로 한인들은 무례하고 흑인 고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흑인에 대해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으로 나타났다.
미국에 살고있는 한인들이 흑인들에 대해 다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퀸즈칼리지 민병갑 교수(사회학과)가 1992년 한인상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어느정도 나타났다. 민교수가 조사한 93명의 흑인지역 한인 상인들이 흑인을 스테레오타입하는 문장들에 대해 동의한 퍼센티지는 1.흑인은 일반적으로 백인보다 지능이 낮다는데 61.3%가 동의했고 2.흑인은 일반
적으로 백인보다 게으르다는데 45,2%가 동의했다. 3.흑인은 일반적으로 백인보다 덜 정직하다는데 61,3%가 동의했고 4.흑인은 일반적으로 백인보다 범죄성향이 높다는데 69,9%가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 전문가는 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흑인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해소시키려는 경향마저 보였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인들은 자신이 인종차별을 받으면 분개하면서도 흑인들을 공공연히 멸시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도 서슴치 않는 이중성을 보인적도 있었다. 그와같은 편견이 미국에 오래 살면서, 또 그들과 접하면서 서로 이해하는 쪽으로 변해갔지만
한국인들의 의식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타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표면화 됐던 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쨋든 90년대 중반부터 뉴욕일원에서 넘어야했던 한인과 흑인간 갈등은 사라졌고 20년 가까이 재발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이에대해 민병갑 교수는 보다 전문적인 시각으로 분석을 하고 있다. 과거 흑인지역의 소매상은 주로 한국이민자들이 했지만 이제는 소매업자들의 인종배경이 다원화되어서 흑인들이 한인상인만을 표적으로 불매운동을 할수가 없다는 것이다. 흑인지역 상
인들의 인종배경이 다원화되어서 이제 한국상인은 물론 다른 어느 민족을 대상으로도 흑인주민이 배척하기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흑인지역 주민의 인종배경 또한 다원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도시개발의 결과로 흑인지역에 대형회사가 들어오고 새로운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자 백인 중산층도 흑인지역에 많이 유입됐고 라틴계 이민자들도 흑인지역에 정착
했으므로 과거의 흑인지역은 이제 더이상 흑인이 절대다수인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흑인지역에서 비지니스를 하는 상인의 인종과 지역주민 인종의 변화는 비단 뉴욕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로스엔젤레스나 시카고등 미전역의 대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민교수는 앞으로 미국의 어느 흑인지역에서도 타민족 상인을 거부하는 과거와 같은 불매운동이나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루클린 흑인시위를 종식시킨 시청앞 인종화합 평화대회
■ ‘4.29 LA ‘흑인폭동’
한인 삶의 터전 순식간에 폐허로
로드니 킹 사건판결에 대한 분노 한인상인 상대로 폭발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난 1992년 4월29일 흑인폭동이 발생했다. 이지역 한인사회에 엄청난 재산피해와 함께 충격을 안겨주었던 LA폭동은 미국내 인종갈등의 십자가를 한인들이 짊어졌던 사건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백인 경찰들에 의해 구타당한 흑인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인해 격분한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인종적 분노를 엉뚱하게도 한인사회를 향해 분출시킨 사건이었다고 현지 한인사회는 단정짓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때 미국언론들이 이사건을 한인과 흑인 두인종간 갈등으로 몰고간 왜곡된 사건이었다는 풀이다. 로드니 킹이 백인경찰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사건의 재판이 폭행 경찰관들에게 무죄평결이 나자 흥분한 흑인들은 이날밤 거리로 뛰쳐나와 폭도로 변했고 이들 시위대가 LA 한인상가를 집중적으로 약탈했던 사건으로 인해 한인 에드워드 이군이 파살되고 46명의 부상자를 냈다. 한인들의 재산피해도 엄청나 전체의 절반을 넘는 4억달러에 달했다.
폭도들로 부터 공격당해 전소되거나 파괴된 점포만도 2천5백여개나 됐다. 이때 아메리칸 드림을 잃은 한인들은 삶의 현장을 떠나야 했다. LA를 며칠간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이사건으로 인해 약탈의 대상이 됐던 한인들은 경찰의 보호도 받지 못한채 억울하게 당했다. 이사건은 한인이민 역사상 최초로 집단적인 인종차별을 받은 잊을수 없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LA 흑인폭동으로 폐허가 된 한인상가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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