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일요일 아침 예배가 끝난 후 교우들 몇 명과 랭캐스터로 파피꽃을 보러갔었다. 완만하게 구릉진 들녘이 오렌지색의 파피꽃으로 물감을 쏟아 부은 듯 했다. 오래 전 한 여인이 뿌린 야생 파피꽃 씨앗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꽃동산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꽃잎이 더 크고 더 많이 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곳엔 이제 겨우 꽃망울을 맺은 작은 파피도 만개한 꽃그늘에서 움트고 있었다. 늦게 피는 꽃… 사람들의 시야에서 비껴난 작은 꽃봉오리들이 미풍에 하늘거린다.
아침마다 정원에 있는 꽃들을 보며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마을로 올라오는 찻길 양옆엔 정원사들의 솜씨로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지며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그 찻길 양쪽 높은 담엔 담쟁이 넝쿨이 엉켜 있어 겨울이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찻길 양옆의 담쟁이가 잎을 피우는 시기가 달라서 서향으로 난 벽의 담쟁이는 2월부터 움이 터서 3월이면 잎이 울창해도 동향 벽의 담쟁이는 그때도 겨울잠을 자고 있다.
동향 벽 담쟁이는 4월이 되어서야 겨우 움을 트더니 며칠 사이에 반대편 담을 능가하는 커다란 잎으로 담을 온통 새파랗게 덮었다. 동종의 담쟁이인 그들의 겨울잠이 일찍 깨거나 한 달 늦게 깨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향이 반대인 담 벽에 쏘이는 따뜻한 햇볕의 차이인 것 같다. 햇볕을 더 오래 받아 한 달 먼저 핀 잎은 하지만 가을에 한 달 먼저 단풍 들어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다.
4월은 아름다운 꽃들의 잔치뿐만 아니라 대학의 입학 통지가 오는 희비의 시즌이기도 했다. 집안 친척이 손녀가 동부의 유명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하시며 그 대학을 방문하고 오셨다고 한다. 한편 아는 언니의 손자는 기대했던 UC대학에서 낙방해 시티칼리지에 보내기로 했다며 "2년 후에는 UC로 전학갈 수 있겠지…" 하면서도 쓴 입맛을 계속 다시고 있다.
긴 안목으로 생을 바라본다면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떨어졌다고 주저앉지 말고 계속 전진하면 늦게라도 잎은 피게 마련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세상을 보는 능력이 더 커지고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삶을 보는 안목이 깊어져 진정한 생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서 전화위복의 새 삶을 이룰 수도 있다는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삶에는 일찍 피고 늦게 피는 시기에 민감하며, 어느 길을 선택할지 애탈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조금 일찍 핀다고 인생의 성공이 아니며 조금 늦게 핀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걸 시간의 지혜가 말해준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프랑스의 문화상이었던 ‘왕도’의 작가 앙드레 말로가 말했다. 일찍 핀 파피꽃은 바람에 하늘거리며 행복한 봄을 만끽할 것이다. 좀 늦게 피는 파피꽃도 늦은 봄과 초여름을 아우르는 더운 바람에 더 큰 꽃잎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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