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에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미술품을 수집하고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삶과 문화재 모음을 다룬 미주한인 이충렬씨의 책이 최근에 나왔다.
간송은 당시 일본으로 모두 반출되고 있던 조선의 골동품들(특히 고서화, 도자기, 옛 책 등)을 사재를 털어 사들였다. 그 중에는 지금 국보 68호인 고려청자 ‘천학매병’도 있다. 또 그는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19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히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을 사들였고, 전쟁 중에도 그것을 간직하여 우리에게 남겼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만석꾼 지주의 후손으로 24세 때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조선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문화재란 민족의 얼과 혼이므로, 조선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그는 젊은 나이에 문화를 지키는 삶의 방향타를 잡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해방 때까지, 전국에 흩어져 떠돌면서 일본 수집가들을 통해 일본과 국외로 빼앗기고 있던 서화(특히 겸재, 현재, 오원, 단원, 혜원, 추사 등의 것), 고려청자, 이조백자, 조각과 공예, 불상, 석탑, 서적들을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보물들도 그 곳에까지 가서 사 가지고 와서, 조선의 유물들을 우리의 땅에서 지키도록 했다.
그는 당대의 고서화 감식안이었던 오세창과 같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모두 고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수집을 했다. 아울러 보성학교 등 교육 사업에도 힘썼고, 탄압받던 당대의 학자들과 예술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절망의 시대 일제 강점기에 모든 난관과 희생을 무릅쓰고 한국의 국보들과 혼을 지킨 문화의 수문장이 되었다. 1938년(32세 때)에 그는 서울 성북동에 사립박물관 보화각을 짓고 수집품들을 보관하고 정리하여 오늘날의 간송 미술관을 후대에 남겼다.
민족 문화유산의 보고인 이 미술관의 소장품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 소장품 중에는 현재 국보 12점, 보물 10점 그리고 서울시 지정 문화재 4점이 있다. 이 미술관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과 10월에 소장품들을 골라서 전시하는데, 매년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다.
2006년 간송 탄생 100주년 전에는 ‘천학매병’ 등 국보급 보물 100점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경술년 국치 100주년 추념 회화전이 열려 구 한말과 1910년 전후에 그려진 안중식, 민영익, 김진우, 조동윤, 고희동, 김규진 등 당시 대가들의 걸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간송은 해방 후 그동안 진 빚을 갚으려 동분서주하다가 1962년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우리는 그의 업적과 뜻을 계승하여,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인 한글과 예술품 등 문화재를 소중히 지켜야 하겠다.
이연행 / 불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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