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셜리 쉬러드 전 농무부 흑인여성 국장이 주류방송에 잇달아 출연하고 있다. 쉬러드가 매스컴을 타게 된 것은 올해 3월 미국 최대 흑인인권단체인 유색인종지위향상협의회(NAACP) 행사에 참석해 행한 연설이 화근이 된 때문이다.
연설 내용 중 1986년 파산위기에 있던 농부가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않았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즉시 농무부는 그에게 사직을 종용, 쉬러드는 하루 만에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녀의 입지는 드라마틱하게 역전되었다. 그녀의 연설이 동영상에 다시 공개되면서 이전의 내용은 왜곡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4년 전 피해 당사자인 백인 농부의 부인 엘로스 스푸너가 CNN에 출연해 쉬러드는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면서 그녀를 변호하는 바람에 농무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백악관 깁스 대변인은 의문점을 먼저 파악하지 않고 섣부르게 부절적한 대응을 한 점을 시인하는 공개적인 사과를 하였다. 이어서 톰 빌색 농무장관도 그녀가 해고 압력을 받고 사직을 종용받은 것은 부당한 대우였다며 그녀의 복직을 원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통화가 7분간이나 이뤄졌다.
이 사건이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바마 행정부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그녀의 백인 인종차별 발언이 선거 파문을 일으킬 것을 미리 차단하고자 쉬러드의 해고를 서둘렀다가 다시 복직을 제안하는 등 민감한 인종차별 이슈의 불을 끄느라 요란 법석이다.
그녀는 지난 봄 NAACP 행사에서 45분간의 긴 연설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장의 농부로 침례교회의 집사였다. 1965년 39세였던 그의 아버지는 백인 이웃과 젖소를 둘러싸고 사소한 말다툼을 한 끝에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이 비극은 17살이었던 그녀에게 흑인민권 운동가로 활약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남부에 1960년대는 흑인민권운동의 획기적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던 해였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1965년 앨라배머,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87킬로미터의 흑인민권운동 행진을 기억한다. 최루탄 가스 속에서 백인 경찰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던 끔직한 장면이었다. 그해 8월6일, 미국 흑인 투표권법안이 통과되었다.
버스승차 거부운동과 흑백분리 철폐, 투표권보장운동에 이르기까지 흑인들의 피로 물든 길고 긴 여정이었다. 1863년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은 남북전쟁의 명분과 전략이었으나 흑인들이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노예 쇠사슬을 끊은 무기는 1965년 쟁취한 투표권이었다.
지금 애리조나 반 이민법 통과로 반 이민정서가 확산되어가고 있다. 아시아계 유색인종들에게도 그 불똥이 언제 튈지 모른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1960년대의 흑인 민권운동으로 인한 인종차별 시정조치의 수혜자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쉬러드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선거 이슈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아직도 인종차별의 고난의 길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해고되었던 흑인 공무원여성의 쾌거는 흑인 민권투쟁의 결실이다.
박민자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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