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 ‘초원의 빛’(엘리아 카잔 감독)에는 강렬하면서도 가슴 아린 장면이 많았다. 시골 고교 동급생인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의 이루어지지 못한 풋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영국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대표 시 중 하나로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초원의 빛’도 덩달아 떴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안 돌려진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초원의 빛이 빛날 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나탈리 우드가 수업시간에 일어나 이 시를 낭송하다가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각각 다른 길을 간 두 연인이 먼 훗날 남남으로 재회한 날에도 초원의 빛은 강렬했다.
필자는 10여년전 이맘때 햇살 쏟아지는 초원이 아닌 어두컴컴한 숲속 오솔길에서 워즈워스를 만나 깜짝 놀랐다. 160년 전에 죽은 이 낭만파 시인의 유령을 본 게 아니라 그의 글을 접한 것이다. “사물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라. 자연을 너의 스승으로 삼으라”는 그의 짧은 어록을 담은 허름한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시비(詩碑)가 아니었다.
이 어록 판이 서 있는 월레스 폴스(Wallace Falls) 주립공원은 워즈워스도 찬미할 만큼 자연경관이 완벽하다는 것을 그날 확인했다. 그보다 더 높고, 더 멀고, 더 북적대는 등산로를 지난 10년간 쏘다녔지만 다른 어디서도 대 시인의 글을 보지 못했다. 월레스 폴스가 아름답다는 분명한 증거는 또 있다. 한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점이다. 맛있는 식당과 명품 점에 한인들이 몰리듯 아름다운 산에도 예외 없이 한인 등산객들이 몰린다.
월레스 폴스는 캐스케이드 산맥의 중간지점 아랫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2번 국도를 따라 독일촌 방향(동쪽)으로 가다가 먼로를 지나 골드 바 부근에 이르러 왼쪽을 보면 산허리에 폭포가 걸려 있다. 마치 초록색 천에 굵은 흰 실을 붙인 모양새다. 눈에 너무나 잘 띄는 탓에 1977년 주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필자는 1999년 초겨울에 ‘비오는 날에도 갈 수 있다’ 등산 안내책자의 설명을 읽고 혼자서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갔다. 워즈워스의 어록 판을 지나 ‘숲길 등산로(Woody Trail)’에 들어서자 무주구천동 같은 계곡물이 반겨줬다. 왕복 5마일 등산코스가 올라가지만 않고 내려가기도 하고, 계곡을 거슬러 가다가 나란히 가기도 하는 등 방향이 수시로 바뀌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여러 곳에서 보이는 폭포도 눈을 즐겁게 해줬다.
필자는 그 후 스노호미시 한인노인회 회원들을 비롯한 많은 동포 동호인들과 어울리며 매주 토요일마다 월레스 폴스를 찾아갔다. 아마도 2000년대 초 몇 년 동안 줄잡아 50번은 올랐을 터이다. 노인회가 토요등반을 중단한 뒤에도 남은 동호인들이 계속 이곳을 찾았고, 이들이 2005년 5월 시애틀 한인등산회(현재의 시애틀 산악회)를 결성했다. 회원들이 필자의 환갑잔치를 떡 벌어지게 차려준 곳도 바로 월레스 폴스의 피크닉 정자였다.
그 무렵 시애틀 한인사회의 올드 타이머이자 수필가인 회원 한분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등산로 중간쯤에 김소월이나 서정주의 시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찾는 등산로이므로 경비만 마련하면 당국이 승인해 줄 것 같단다. 그러나 일반 등산로도 아닌 주립공원 안에 조형물을 세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공원 트레일 자체가 등산객들이 마구 다니며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마련된 것이라고 했다.
지난 토요일 산악회 동료들과 오랜만에 월레스 폴스에 다시 갔다. 등산로 초엽에 여전히 서 있는 워즈워스의 어록 판을 보자 ‘김소월 시비’ 생각이 되살아나 산행을 마칠 때까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워즈워스 어록 판과 마주 세우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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