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19혁명이 발생한지 51년이다.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으니 세월의 덧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1960년 4월19일, 나는 대학 3학년 학생이었다. 전날 고대생들이 3·15부정선거와 마산학생 김주열의 처참한 피살을 규탄하는 항의시위를 하고 귀교하던 중 동대문 중심의 정치폭력배 이정재의 수하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 뉴스를 접한 서울의 모든 대학생들이 다음 날 일제히 데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날 아침 등교하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가 교정은 학생들로 채워지기 시작했
고 어느 순간 너나없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학교가 종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지까지 달려가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중앙청과 남대문 사이의 광화문과 서울시청 일대는 문자 그대로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는 국회의사당과 어용언론이라 불렸던 서울신문사(현재의 프레스센터 부근)사이의 도로 한복판에 연좌한 뒤 연신 구호를 외쳤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고 감정이 고조되더니 일부 무리는 파출소에 방화하고 차량을 탈취하여 거리를 질주하는가 하면 경무대(청와대)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면서 무력진압이 시작됐고 시위대가 사대문 밖으로 쫓겨 가면서 한밤중이 돼서야 사태가 겨우 진정되었다.
그 후 정부당국의 휴교조치와 계엄령 선포로 군인이 시내를 장악하여 이대로 끝나는가 싶더니 4월26일 대학교수들의 침묵시위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와 뒤이은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일가족 자살로 마침내 집권세력인 자유당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함께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희생되어 4·19국립묘역에 잠들어 있는 같은 대학 친구 안승준의 명복을 빈다.
4·19혁명은 부정선거, 즉 바르고 떳떳치 못한 정치권에 대한 항의이자 도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없었던 순수한 대학생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정치세력화 하지 못하고 대신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야당, 그 중에서도 민주당이었다. 사실 정치판을 그렇게 만든 것은 자유당뿐만이 아니다. 모든 정당이 오십보백보였다.
구파와 신파간의 이전투구는 사회혼란으로 이어져 마침내 5·16 군사쿠데타를 자초했고 그 이후의 한국은 놀랄만한 국력신장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의 규탄대상이었던 정치권의 파쟁과 기득권 싸움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국민이 진정으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공명정대한 정치가 필수적이며 이는 국민의 바른 판단으로만 가능하다. 결국 모든 책임은 국민에게 달려있는데 작금의 정황으로 볼 때 혁명은 완수 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 정의로운 정치풍토가 조성될 때까지 4·19혁명은 결코 끝나지 않은 것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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