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에 있는 캠프 캐럴에서 근무하던 한 퇴역군인이 애리조나 지방 TV에서 가진 양심선언(?)에서 고엽제를 비밀리에 파묻었다는 기사가 방영되고 난 후, 한국의 모든 언론은 이와 관련된 기사들로 연일 대서특필했다. 나의 걱정은 이것이 친북 세력이랄까 종북 좌파라 할까 하는 단체들에게 빌미를 주어, 서울 거리를 마비시키는 촛불 시위까지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나는 한국계 미국 시민으로서 매우 당혹하게 된다.
1960년대 초중반 나는 대학생이었다. 군대 간 친구가 휴가 오면 대폿집에서 떠들어 댔고, 학교 캠퍼스 풀밭에서는 복학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 화제의 으뜸은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서로들 몰래 적진을 잠입해서 죽였느니, 적의 목을 따 왔느니 하는 무용담이었고, 휴전선 초소에서의 여러 에피소드였다. 시야를 넓게 하려고 나무를 베고, 제초를 하는 고생 같은 것도 중심 화제였다.
그리고 1968년 1월 김신조 청와대 기습사건 때쯤에는 비무장 지대에서 제초 작업이 정점을 이루었다. 그런 정황을 연결시켜보면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쓰던 고엽제를 한국을 쓰레기 처리장으로 생각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필요해서 들여온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이곳저곳 자료를 들쳐보니 미군 당국이 고엽제가 인체에 해로우니 파기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 주한미군들이 고엽제를 묻었다는 1968년이다. 하지만 미군 당국도 그 당시는 오늘 날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 중에 고엽제 희생자가 많이 발생된 것 같다. 그러니 주한미군이 당시에는 그저 땅속 깊이 묻으면 되겠지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한국은 목숨을 담보로 베트남전에 참전, 베트남에 인력을 진출시켜 먹고 사는 것이 절실했던 시절이다. 그러니 1968년 매몰 당시에는 고엽제에 대해서 따지기 전에, 그러한 이슈는 ‘무슨 배부른 이야기’이냐고 했을 것 같다.
그래서 먹고 살만하고 복지를 생각할 수 있는 1999년에 이르러서야 ‘베트남 참전 고엽제 희생자’를 위한 법이 제정이 되고 월 25만원씩의 보조금이 지불 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상황의 변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미 당국을 좀 옹호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아마도 그들도 땅에 묻은 고엽제이던 독성 화학제이던 그 심각성을 그 이후 차차 느끼기 시작 했을 것이다. 이제 이 이슈는 모든 것을 숨길 수도 없다. 또 미군 당국도 문제 해결에 힘 써야 하고 또 그리 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다만 나는 이 상황이 제초제의 독성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된 것이고, 고의성은 없었고, 한국 국민을 업신여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이 반미 촛불 데모 같은 사태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영묵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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