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배약사들 정착 일등공신...뉴욕한인 약사들의 대부
▶ 1973년 약사회 창립
1996년 ‘약사의 밤’ 행사에 참석한 한인약사들. 이때만 해도 1세가 대세였다.
80년대초 플러싱에 AC약국 개업 10여년간 운영
1973년 창립된 재미한인약사회는 한인 약사들이 뉴욕주 약사 면허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뉴욕주 한인약사 제1호인 오민근이 후배들에게 약사시험 문제집을 갖고 시험공부를 하면서 의기가 투합된 나머지 그해 6월15일 브롱스 보태니칼 가든에서 50여명의 멤버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을 보게된 것이었다. 장소를 브롱스로 택한 것은 시험공부 장소로 사용되던 브롱스한인교회가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태영목사가 시무하던 브롱스한인교회의 2층 스페이스를 무료로 빌려 매주 일요일 약사 면허시험 준비반이 모이던 때였다.
이때 강사로 나선 오민근(사진)은 그로부터 4개월전 뉴욕주 약사면허 시험을 패스한 최초의 한인이었다. 그의 스토리가 한국의 약업전문지 ‘약사공론’에 소개되자 수많은 한국 약사들이 뒤따라 미국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외국인 약사들의 이민문호를 활짝 열어놓기는 했지만 한국 면허를 가지고 곧바로 약사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외국면허를 인정하지 않았고 주별로 별도의 자격시험을 치도록 하는 규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뉴욕주가 1,000시간 이상의 인턴과정을 거치면 응시자격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약사들이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면서 1,000시간 이상을 이수해야 되는 인턴 경쟁에 먼저 뛰어들었다. 다행히 인턴 자리를 찾은 수험생들은 다음 절차로 시험준비 강좌가 열리는 브롱스교회로 몰려들었다. 많을 때는 200명 가까이 모였다. 이듬해인 1974년 3월26일자 뉴욕 한국일보에는 ‘뉴욕주 약사시험에 5명 합격, 브롱스교회서 축하연’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오민근의 강좌를 듣고 응시한 첫 합격생들이었던 셈이다. 이후로 매년 더 많은 합격생들이 탄생했다. 시험장엔 오민근을 비롯한 합격생들과 수험생 가족들이 떨면서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이 연출됐다. 한국의 대학입시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대한약사회 민관식 회장이 직접 날아와 수험생들을 격려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합격률은
약 50%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시험이 어려운 것 같았다.
약사시험 준비과정에서 나타난 그와같은 선후배간의 따뜻한 격려와 열정은 그후 재미한인약사회를 결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창립되면서 초대 회장에 추대된 오민근은 3대까지 연임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국땅에서 후배들을 위해 기울인 봉사정신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창립 당시 50여명이던 약사회 가족은 이후 3년간 500명 회원으로 늘어났다. 창립멤버로 시험준비반을 함께 이끌던 권오윤을 비롯, 김총태, 김형섭, 장상길 등 후임 회장들이 협회 발전을 주도했다. 단체 명칭도 뉴욕한인약사회로 변경했다. 그렇게 뉴욕주 약사 자격을 얻은 한국 약사들의 많은 수가 종합병원 약제과로 진출하고 일부는 개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인사회가 팽창하면서 개업 약사 중 상당수가 성공적인 정착을 이룰 수 있었다.
내년으로 창립 40주년을 맞는 뉴욕한인약사회는 그동안 변화 속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중앙대, 성균관대 등 한국 약대 출신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가 온 것이다. 1,5세, 2세 약사들이 출현하는가 싶더니 2,000년을 넘어서면서 과반수에 달했고 3년전 1.5세 조명하 회장이 리더가 되어 협회를 이끌게 되었다. 오민근의 추산에 의하면 뉴욕의 한
인 약사들은 7대3으로 이미 1세가 소수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와함께 집행부도 세댸교체를 이루게 되었다. 한인단체의 세대교체는 변호사협회, 의학협회, 약사회 등 전문 직업인 단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년으로 미국생활 41년을 맞는 오민근은 약사로서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서울대 약대 출신으로 약사면허를 따고 군에 입대해 육군중위로 제대를 했다. 한때 청량리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미국 국제개발처(US AID)에서 모집한 월남 근무 약제관에 응해 3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할 무렵 우연히 주 월남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이 외국출신 약사들의 이민을 장려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미국영사로 부터 추천서를 받았던 오민근은 서울로 돌아와 대한
약사회 전무로 취임하면서 시간을 갖고 이민수속을 진행시켰다.
1965년 개정된 이민법 실시에 따라 의사, 약사, 간호사 등의 의료전문직 이민을 확대시킨 미국은 거대한 사회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에 진입하면서 특히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국가별로 연간 2만명씩 받아들였다. 오민근의 이민은 71년에 이루어져 그해 9월3일 뉴욕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도착하면서 대전중학교 동창회 야외파티에서 만난 선배 박원혁의 배려로 뉴욕주 업스테이트 뉴버그의 세인트 루크스 병원 약제과에 취직이 되었다. 병원 근처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3살부터 9살까지 고만고만한 4명의 사내애들이 뛰는 바람에 아파트를 쫓겨나는 경우도 당했다. 2,000시간 인턴 근무를 채우고 나서 정식 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생겼다. 면허를 취득하고 브롱스의 재코비병원으로 옮기면서 후배 약사들에 대한 그의 열정이 표출됐다.
초창기 2-3년간 무료 강좌로 봉사했던 오민근은 재코비 병원 7년, 퀸즈 제네랄 병원 2년 등 약제과 근무를 마치고 80년대 초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AC약국을 개업해 10여년 운영하다가 환갑을 맞은 94년 은퇴했다. 그러나 은퇴 직후 아주 약한 하트어택을 당한 경험이 있다. 빠른 기간 회복은 했지만 주치의의 처방은 가벼운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처방대로 그는 요즘도 미국인이 경영하는 약국에 파트타임으로 주 3일 정도 일을 하고 있다. 환자들에게 약을 지어주는 일은 그의 천직이어서 크게 힘드는 일도 아니다.
한국 나이로는 내년으로 80을 맞게되는 그. 어느덧 3대 17명의 가족을 온전히 미국땅에서 거느리게 되었다. 부인 박은실은 정착시기 브롱스에서 가발가게를 운영하며 가계를 도운 적도 있다. 아들 네명 가운데 세째와 네째가 그의 뒤를 이은 약사이고 며느리 중 한명도 약사, 그리고 보스턴대 약대에 다니는 손자가 졸업하면 3대에 걸쳐 5명의 약사가족이 되는 셈이다. 매년 새해를 맞는 1월1일은 설날이기도 하지만 그의 생일이어서 일가족 3대가 함께 모이는 오 패밀리데이 이기도 하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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