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세들 역량발휘 비전 제시해주는게 1세들 몫
▶ 시 인권담당 커미셔너 외 12개단체 이사등 왕성한 활동
Kalca의 갈라 행사. 왼쪽부터 김영덕 고문, 찰스윤 이사장, 샌디김 사무총장, 폴윤 이사, 케빈 오툴 뉴저지주 상원의원, 애나벨박, 에드워드강 이사, 유은희 고문, 에이미홍 이사.
그는 요즘 뉴욕 한인사회의 정치력이 다소 신장되고 한인들의 목소리가 점차로 커져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 한인사회에 직접 참여해 조직을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한인사회의 장래를 항상 염려하면서 2세들의 진로를 묵묵히 도와주고, 그들이 미국사회에서 자유스럽게 역량을 발휘활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흔히 이민 1세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2세들에게 무조건 따르라고 강압하는 자세를 비판하면서 2세들은 그들이 하고싶은 대로 놓아두면 훨씬 더 잘 미국사회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유은희(그레이스 류 볼크하우젠)
한인사회가 동기부여만 해줬더라면 커뮤니티를 위해 액티비스트로 열렬히 활동했음직한 여장부 유은희. 문제에 대해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자세 때문에 다소 외교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을런지는 몰라도 한인사회에 그와같은 쓴소리가 한사람쯤은 있어도 될만큼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제가 1960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으니까 일찍 온 셈이죠.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 2세들이 우리집에 가끔 전화를 하고 찾아와요. 브런치를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듣기만 하는 편이었죠. 그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정착하느라 생활이 어려웠어요. 드라이클리너, 델리, 야채가게, 생선가게 그게 얼마나 힘든 직업이에요. 그러면서 아이들한테는 의대에 가라, 로스쿨 가라고 강요하던 때죠. 저의 남편도 로스쿨 출신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찾아온 2세들에게 부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라고 진심으로 충고했죠. “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한국 스타일로 다그치는데 대해 부정적 견해를 밝히면서 젊은이들이 미래를 향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자는 취지로 2000년에 창설한 것이 칼카라는 단체였다. Korean American League for Civic Action, 번역하자면 한미시민활동연대. 주로 한인 1,5세 2세들을 위해 설립한 비영리 단체이다. 한인과 아시아인의 시민활동 참여를 격려하고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정치, 비종교, 지역사회 단체이다. 칼카는 미국 시민으로서 지역사회 주민들의 권리와 의무, 책임을 교육하고 시민활동에 참여하여 미국사회에 기여할 것을 격려하는 단체로 출발했다.
단체 성격으로 본다면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한 기구로 분류할수 있다.
특히 지도력을 갖춘 1,5세, 2세들을 발굴하여 그들에게 공직 지도자가 될수 있도록 교육 및 멘토링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도자 양성 인턴쉽 프로그램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어느정도 성공적인 운영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준희 전 에디슨 시장을 비롯, 뉴욕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김지해(PJ Kim), 김덕은(케빈김), 뉴저지 하원의원에 도전했던 이어진, 김 아스베리 등이 모두 칼카 출신이다.
정치인들을 예로 들었지만 칼카가 여름 8주간 인턴쉽을 끝내고 배출시키는 분야는 다양하다. 주로 퍼블릭 서비스, 사회사업, 차일드 케어 등 금년에는 16명의 젊은이들이 미래의 미국사회 공직자가 될 꿈을 안고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현대 종합상사 시절부터 뜻이 잘 통하는 김영덕씨와 함께 고문 직을 맡고 있다.“한인사회를 위해서는 오래전부터 YWCA와 연관을 맺고 일해왔어요. 지금은 칼카를 충실하게 도와주고 있지만 어느 단체든 저의 힘이 공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죽기 살기로 도와드릴 용의가 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조직적으로 어프로치를 해야 좋은 결과를 얻어낼수 있어요. 불평하지 말고 문제 해결에만 집중해야 돼요.”
그는 특히 민주당과 관련해서 미국사회에 인맥도 넓고 경험도 풍부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자신을 갖고 하는 말이다. 뉴욕대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민주당에 입당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으니 이제는 결실을 거둘만한 때가 되기도 했다. 액티비스트로서의 그의 기질은 신혼 초부터 발산되기 시작했다. 브루클린 캐롤 가든으로 이사오면서 이웃들과 협동하는 그룹을 형성하면서 지역사회 풀뿌리 정치 리더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유치원서부터 스타이브슨트 하이스쿨까지 PTA(학부모회) 회장을 도맡아 하면서 70년대 휴 케리 뉴욕주지사 후보를 위한 텔레폰 뱅킹도 했고 뉴욕시, 뉴욕주 의원들의 선거운동에도 참여했다. 미국사회에 그레이스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한때 에드워드 카치 뉴욕시장의 고문(어드바이저),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실의 에이시안 아메리칸 오피스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박사학위 전공이었던 메디에이션, 분쟁 조정 능력과 킹스 커뮤니티 칼리지, 뉴스쿨 등에서 가르쳤던 경험이 정치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연세대 시절 YWCA 회장 리더쉽이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아시아 재단 디렉터 출신 남편 윌리엄 볼크하우젠 (2001년 작고)의 외조가 큰 힘이 되었다.
1980년대 한인들이 개발한 네일 비즈스가 급성장하면서 미국 미용계의 불평을 접수한 뉴욕주가 라이선스 제도를 시행할 당시 박종규 뉴욕한인 네일협회장의 요청에 따라 마리오 쿠오모 주지사, 게일 세이퍼 세크리터리와 면담을 통해 그랜드파 룰을 적용시키는데 합의했던 일은 기억나는 케이스 중의 하나다. 이에따라 기존 2,000여명의 한인 종업원들이 18개월 취업사실만 증명하면 자동적으로 면허를 취득할수 있도록 했고 이후 라이슨즈를 위한 시험도 한국어로 칠수 있도록 합의를 이끌어 낸 적이 있었다.
그의 현직은 뉴욕시 인권담당 커미셔너 외에 환경과 어린이 문제, 홈리스를 돕고있는 타이거 배런 재단 회장, 그리고 12개 단체의 이사를 맡고 있는 활동가이다. 다섯 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있는 딸 섀론과 아들 알렉스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고, 할머니를 “아미”라며 따르는 두 외손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할머니이기도 하다.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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