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아메리카 대륙의 풍운아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원순옹(오른쪽)을 필자가 맞았다.
친구인 KOC 여운형 회장 부탁으로 IOC가입위해 동분서주
1947년 스톡홀름 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IOC 가입. 런던올림픽 출전 승인
대한민민국 여권없어 타자로 직접찍은 사제여권 사용...최근 문화재로 지정
제30회 하계 올림픽대회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7월27일 개막되는 런던올림픽에는 전세계로부터 1만 5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전을 벌이게 된다. 이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선수단은 350여명 규모로 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런던올림픽은 64년 전인 1948년에도 한차례 열린 적이 있다. 그 때는 신생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하루 전에 개막됐기 때문에 한국 선수단이 국적을 가지고 출전하는데 여러가지 애로가 많았다. 그당시(미군정 시절)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런던올림픽 출전 길을 터놓은 숨은 인물이 있었다. 뉴욕에서 부동산 비즈니스로 재산가가 되어 뉴욕한인회장으로 활동하던 선각자 이원순이었다.
▲이원순
당시의 뉴욕한인회는 관제 성격의 단체로 총영사 남궁염이 회장을 하다가 이원순에게 바통을 넘겼고 이원순은 귀국하면서 이를 미국의 소리 방송 민재호에게 넘겨준 기록이 있다. 이원순에 관한 스토리가 일부 한국언론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그가 만들어 사용했던 사제 여권이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필자는 지난 1986년 서울에서 이원순(1890-1993)을 만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민관식(전 대한체육회장)의 소개로 당시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한 이원순으로부터 그의 뉴욕생활과 런던올림픽에 관련된 소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 한국 문화재청으로부터 그의 개인여권 사본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더욱 실감나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부터 53년까지 8년간 뉴욕에 살았던 이원순은 맨하탄 남쪽 바워리 섹션의 하우스턴 스트릿(105 이스트)에 거주하면서 당시 관제 성격을 띠었던 뉴욕한인회장(1951년-53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생업은 주로 교회건물을 중개하던 부동산맨이었다. 그가 뉴욕에서 스포츠와 연관돼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공헌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발족을 본 조선올림픽위원회(KOC)의 여운형 회장은 경신중학 시절부터 이원순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가 초대 KOC 회장이 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따라 뉴욕에 거주하던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부위원장을 찾아간 이원순과 월터정이 한국의 가입과 올림픽 출전을 강력히 요청했고 이때 반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1947년 여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는 한국의 가입 여부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길에 올랐던 전경무 부위원장이 일본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지자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당시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과 여운형 KOC 위원장 명의로 날아든 전문은 이원순이 KOC 대표로 스톡홀름 총회에 급거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비행기 추락 현장에서 발견된 전경무의 가입 서류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총회 열흘을 앞둔 시점이었고 현지로 출발 준비를 마친 이원순이 막상 떠나려니 대한민국 여권이 없었다. 시기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기 1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미국시민도 아니었고 한국은 독립국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던 이원순은 궁리 끝에 하나의 묘안을 짜냈다. 개인 명의로 여권을 자신이 만든 것이다. 공문서 용지에 이름과 나이, 주소를 쓰고 본문을 다음과 같이 직접 타자로 쳤다. “나는 한국인으로 금번 KOC의 요청을 받아 IO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런던에 들러 영국올림픽위원회와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문제를 교섭하려 한다.” 여권이라기 보다는 여행증명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타자지 두 페이지로 된 이 초라한 여권을 들고 이원순은 뉴욕주재 영국 총영사관을 찾았다. 이를 받아든 영사관 직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게 뭡니까?”“보시는대로 내 개인 여권 입니다.”내용을 천천히 읽어본 직원은 한동안 여권을 만지작거리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영사실로 들어갔다. 한참만에 환한 얼굴로 나온 그는 두말없이 비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자신을 얻은 이원순은 곧바로 덴마크 총영사관에 가서도 어렵지 않게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1947년 6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원순이 직접 타자로 찍어 사용했던 사제 여권. (문화재청 홈페이지)
총회에 임박해 스톡홀름에 도착한 이원순은 IOC에 가입신청을 했고 6월20일 소집된 제40차 총회에서 “아시아의 작은 신생국에게도 올림픽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끝에 한국의 가입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이원순은 곧이어 영국으로 날아가 런던올림픽위원회에 한국선수단의 출전 신청도 할 수 있었다. 이때 사용됐던 여권의 빛바랜 원본은 이원순의 모교인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491-1호로 등재됐다.
1890년 서울 을지로 2가 출생인 그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다니다 1914년 국외 탈출에 성공, 하와이에서 자동차 행상, 가구점 운영, 부동산 중개업으로 큰돈을 벌며 박용만,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이승만과는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통해 30년 동안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해방직전 사소한 문제로 불화가 생겨 이승만이 귀국할 때 이원순은 뉴욕으로 근거를 옮겼다. 뉴욕에서 부동산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는 뉴로셀에 호화저택을 구입해 살면서 동포행사에도 적극 참석하고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의 안내역을 맡기도 했다.
1953년 미국생활 40년을 청산하고 귀국, 한국에서 정계입문의 꿈을 펼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대신 그의 부인 이매리가 7대 국회의원에 선출돼 남편의 의지를 대신해 주었다. 말년에 워커힐 아파트에 살면서 독립기념관에 거액을 쾌척했고 82년에는 미국으로 유출됐던 통일신라시대 금동보살삼존상 등 소장 문화재 40여점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는 103세를 일기로 지난 1993년 타계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