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이민자들에 세무정보 외 사업 가이드 역할
▶ 95년 협회 창설, 초대회장 맡아 세미나 등 자영업자들에 실질적 도움
공인회계사협회 창설 초기 세미나에서 조회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1963년 유학생으로 입국, 내년으로 미국생활 50년을 맞는 조태환 일가는 선친과 부인, 그리고 본인 등 세 명 모두 뉴욕 한인사회와 관련해 공적을 남긴 패밀리다. 선친 조병문(전 국회의원)은 1979년 대뉴욕지구 한인상록회 4대 회장으로 봉사했고, 영양학을 전공한 부인 김종원은 뉴욕주와 시정부의 식품위생국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한국식당 업주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왔다.
조태환.김종원 부부
또한 회계학을 전공한 본인은 몇 안 되는 초창기 CPA로, 대뉴욕지구 한인공인회계사협회 창설 회장의 기록을 갖고 있다. 한동안 퀸즈칼리지에서 풀타임 회계학 강의도 했던 그는 임기동안 한인사회에 세무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세미나 등을 열어 특히 자영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조태환이 CPA 사무실을 개업한 시기는 1975년. 미국사회에 CPA의 수요가 한참 늘어나던 때였다. 증권시장 상장사들이 늘어나고 비즈니스가 활발하게 돌아가던 시기여서 미국내 빅8에 속하는 딜로이트 해스킨스 앤드 셀즈 등에서 프랙티스를 익힌 조태환에게는 시의적절한 기회로 다가왔다.
특히 한인 이민자들이 물결처럼 밀려오면서 소규모 자영업을 선택한 초기 이민자들에게 회계사는 값진 조언자 역할을 해 줄 수 있었다. 사업 경험이 전혀 없이 비즈니스에 뛰어든 초보자들에게 세금보고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컨설팅도 자주 해주어야 했다. 그의 조언을 듣고 비즈니스를 키워나가 한단계 점프하는 경우를 지켜볼 때는 뿌듯한 보람도 느꼈다.
“70년대 자영업을 하던 동포들은 정말로 열심히 했습니다. 개척정신을 갖고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가발업, 청과상, 드라이라이클리너스, 의류점 등 저는 그들의 성공을 지켜본 증인입니다. 요즘에도 잘들 하고 계시지만 초창기의 그 개척정신을 잃지 말고 유지해야 합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차이로 인해 고생하는 고객들을 더러 보았다면서 관련법규를 가볍게 여기는 문제점, 사전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해 사후수습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의 세무당국은 요즘처럼 까다롭지도 않았고, 다소 어수룩한 점이 보일만큼 관대한 편이었다고 회고했다.
한인사회의 경제적인 성장을 지켜보면서 관심을 가졌던 그에게 단체를 통한 봉사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5년 대뉴욕지구 한인공인회계사협회가 창설된 것이다. 70년대에 열손가락으로 꼽히던 한인 공인회계사의 숫자가 80년대부터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군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지망생들이 전문교육을 받고 이 분야로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회원 숫자도 8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이제는 협회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됐을 때 호민선, 박태욱, 목상호 등 소장파들의 주도로 창립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연장자인 조태환이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때까지 단체장을 한번도 맡지 않았던 조태환은 커뮤니티에 공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협회를 위해 성심껏 임했다. 임기동안 회원 및 한인사회에 유익한 세미나를 열고 동포언론을 통해 세무상식을 전하는 가이드 역할도 했다.
한편 클라이언트가 늘어나면서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에 자체 건물을 구입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가 갑자기 오피스를 닫고 은퇴길로 들어선 것은 지난 2000년. 지하실 계단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시신경을 크게 다친 나머지 불행히도 두눈 모두 실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이 업습한 시각장애를 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주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점자 교육을 비롯, 맹인용 컴퓨터 교육, 걷기 프로그램 등 미국은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는 나라다. 이후로 기억력이 증진되고 건강은 오히려 전보다 나아진 편이다.
집안에서 펼쳐지는 하루 일과 중 그가 가장 많이 할애하는 시간은 TV시청과 컴퓨터이다.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접할 수 있고 증권시세도 환하다. 청각기능이 예민해져 오래된 지인들은 목소리로 구분할 수 있다.
최근에는 창녕조씨 문중의 가계보를 컴퓨터로 풀어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부부가 함께 미국생활 50년을 조명해 보는 패밀리 이민사도 정리하고 있다. 1남(조재용, 증권 전문인) 1녀(조미아, 교사출신 전업주부)와 친척들에게 남겨줄 경험의 유산인 셈이다.
그에게 유학의 길이 열린 것은 서울대 상대 졸업 후 동아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했던 1963년, 조용히 진행시켜오던 유학의 꿈이 실현됐다. 로드 아일랜드대에서 2년간 행정학으로 석사를 받을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교내식당 청소팀에 조인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혼하면서 뉴욕에 정착했고 바루크 칼리지에 들어가 회계학 석사 코스를 다시 밟기 시작했다. 이때 식당 접시닦기 등 미국사회의 밑바닥 경험을 했다. 한편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찾다가 결국은 공인회계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63년 같은 해 조지아 주립여대에 유학한 부인 김종원은 버지니아 공대에서 식품영양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결혼 후 남편따라 뉴욕으로 왔다. 뉴욕에서는 그의 전공을 살려 종합병원 영양사로서의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브롱스의 레바논 병원, 브루클린의 킹스 종합병원에 이어 뉴욕주 센터 훠 디벨롭먼트에서 25년간 근무, 디렉터를 끝으로 95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뉴욕시 보건국에서 실시하는 위생검열 및 영업시간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 강사로 초빙되면서 한국음식이 미국의 위생법규에 적응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음식의 특성을 당국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한국식당 업주들에게는 법규의 이해를 도와주는, 양측 모두에게 유익한 해결책이었다. 일종의 문화충격 해소 역할이었다. 지난 연말에는 적당한 후임자를 선정해놓고 마지막 은퇴를 했다. 이제는 시각장애로 불편을 겪는 남편을 위해 책과 신문을 읽어주는 눈의 역할을 감당할 각오이다.
한편 오랫동안 뉴욕한인사회의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올드타이머로서 조태환은 한인들이 숫자만큼 미국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키우진 못했지만 앞으로 정치력을 기르는데 한국교회와 기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또한 정치력 신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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