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생활 33년은 훈련기간...당찬 여장부로 살고파”
1920년 미국에서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된지 92년이 지난 지금, 미국 정치에도 여성의 바람이 불고 있다. 뉴욕주 하원의원 40지구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한 이명석, 론 김 후보 인터뷰에 이어 같은 지역에 공화당 후보로 나온 한양희를 만나본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출생한 한양희(60·Sunny Han)의 계보(系譜)는 화려하고도 짱짱하다.1994년 갑신정변시 조선을 지키려다 개화군에게 암살당한 무관 한규직(고종이 충숙(忠肅)공 시호 내림)이 고조할아버지고,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을사보호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마지막 영의정) 한규설이 고조할아버지 동생이다. 아버지 한상준은 탁월한 과학자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창설에 힘을 보탰고 어머니 이웅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을 사촌오빠로 두었다. 1남2녀 중 차녀로 태어난 한양희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앞에 무릎꿇고 앉아 애국심과 어려운 이웃 돌보기에 대해 교육받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조숙한 성장기를 보냈다.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경기여중고를 나와 이화여대 음대에 들어가기까지 정치, 사회에 관심이 없었다. 대학 1학년인 71년 ‘민족 복음화 운동에 앞장선 김준곤 목사를 만나면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한양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한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매주 듣게 되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 자신 예수 사랑에 빠졌다. 이화여대 작곡가 대학원을 졸업한 한양희는 장차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지만 하와이 이민자 3세와 중매결혼을 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1903년 인천에서 갤릭 호를 타고 하와이로 온 노동자 102명 중 한명을 조상으로 둔 시댁은 하와이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고 자신의 자손 또한 미국 정계에 진출시킬 꿈을 갖고 있었다. 한양희는 이 3세와 결혼, ‘연방상원의원 부인’이 될 꿈을 안고 79년 미국에 왔다.
그는 79년 5월 보스턴에 석달간 있으면서 매주말 북동부 해안을 여행했고 크리스천 그룹에서 한인 2세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했다. 79년 9월 워싱턴 D.C.로 가서 한인 이민 브로커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영주권을 받기위해 이민자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는 지, 또 부당한 일을 당하는 지를 보았다. 워싱턴의 로비단체로 직장을 옮기면서 이 악물고 영어를 배웠고 타이프를 배워 나중에는 최고 타이피스트가 되어 케네디 의원에게 가는 편지도 타이핑 하는 등 미 정계가 돌아가는 일을 훤하게 알았다.
결혼 초부터 성격 차이로 삐걱거리던 부부생활은 1983년 하와이로 가서 다시 잘 살아보려고 노력 했지만 1984년 11월 6일 총선이 있는 날 그는 시어머니에게 쫒겨나고 만다.
“그날 시어머니께 중풍이 와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나는 미리 약속이 있었다. ‘하와이 한인회 한인참여운동’을 지휘하며 밴 5대로 한인들을 총선거장으로 날라야 했다.”이때부터 한양희의 인생은 고달파지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되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국제결혼여성들의 자립을 도와주다가 본격적으로 소셜워크를 공부하러 뉴욕으로 갈 결심을 했다. 이혼하고 새출발하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더 큰일을 하고싶다
뉴욕에 도착한 86년, 한양희는 가장 먼저 뉴욕한인회를 찾아갔다.
“아마 그때부터 정치가를 마음에 두고 한인 커뮤니티를 파악하려고 간 것같다.”는 그는 조병창 회장, 변종덕 복지재단 위원장이 활동하던 시기에 한인회 봉사실 차장으로 9개월간 일했다.
그러다가 ‘똑똑한 한국여자가 있다’는 소문에 뉴욕시 인권국에 발탁이 되고 87년부터 15년간 인권국 커뮤니티 담당관으로 플러싱 사무실에서 일했다.
고용인 차별이 고발되며 사실 유무 확인후 정식 소송에 들어가면 피해자를 대변하고 보상하는 일부터 입주자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일들을 했는데 그때 도와준 한인을 비롯 아시안 노인들이 플러싱에 많다. 12년이상 유일한 동양인으로 인권국에서 일하며 각 커뮤니티 보드마다 찾아다니며 인권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스스로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1989년에는 뉴욕시장에 출마한 줄리아니를 위한 한인후원회를 결성하고 후원금을 모아주었고 1993년 뉴욕시장에 재도전한 줄리아니 캠페인을 돕기도 했다. 1990~91년에는 한흑문제에 본격개입하여 한인사회 지도자 5명과 흑인사회 지도자 5명이 매주 만나 토론회를 갖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11테러가 발생하고 2002년 인권국에서 조기은퇴후 18·19대 플러싱한인회(퀸즈한인회 전신) 20·21·현재 22대 퀸즈한인회에서 수석부회장, 정책고문으로 봉사해오다가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2011년 프랭크 파다반 상원의원 보좌관을 지냈고 피터 구, 댄 홀로란, 밥 터너 등 지역 정치인과도 유대관계를 쌓아왔다. “20여년간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왔다. 더 큰 일을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포부로 출마한 한양희, 그는 공약대신 스케일이 큰 희망을 들고 나왔다.
“뉴욕이 발전하려면 플러싱이 경제 문화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이익보다는 중장기 계획을 세워 플러싱이 뉴욕과 퀸즈 경제의 엔진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
그래서 그는 공약이전에 “첫째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겠다. 둘째 어떤 이슈가 다가오든 이것이 옳은 일인지, 합리적인지, 도덕적인 지를 근거로 해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정치인이 되고싶은 걸까.
“이민자들이 이 나라에 살러온 것은 시집 온 것과 같다. 한국정치에만 관심이 많고 미국정치를 잘 모르고 있으면 2세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주인으로서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미국의 건국이념과 공화당 이념이 너무 맞다. 진리가 빠진 자유는 있을 수 없다.
미국을 살리려면 플러싱을 살려야 한다. 플러싱은 미국인들이 뿌리를 내린 터전이다. 21세기에는 동양권이 리드하는 플러싱이 중심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한인 뿐 아니라 모든 인종을 다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정치인이 되겠다. 지역사회가 원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찾아가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정치인이 될 것이다. ”
현재 선거 사무실은 집 주소(Sunny Hahn for Assembly P.O.Box 540916, Flushing, NY 11354)와 전화번호(718-424-4246, 후원금 웹사이트 SunnyHahn.com)를 쓰며 후원회장은 신진기 전 뉴욕한인상록회장, 한태홍 뉴욕뉴저지 청주한씨 종친 초대회장 등이 후원하고 있다. 현재 자원봉사자 30여명과 선거운동을 하고있다.
“미국에 온 이래 33년간 계속 힘들었다. 시한폭탄같은 인생여정이었지만 고통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영적, 지적, 감성을 개발시키는 훈련기간이었다”고 지난 세월을 정리한다. “당선 확신을 갖고 나왔다” 는 한양희는 당차고 용기있는 여장부 정치인이 되고싶어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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