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재원 은퇴후 뉴욕서 노후생활 즐기고 있지요”
2002년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을 당시 김영만 부부를 축하해준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왼쪽)
73년 외환은행 과장으로 미 입국
79년 선경 미주본부장 거쳐 2001년 은퇴
1992년 코참 창설, 3.4대 회장으로 뉴욕한인사회와의 관계증진
뉴욕 한인사회 구성원 가운데 한국계 지상사 주재원 출신들이 의외로 많다. 미국 입국시 비자로 구분한다면 E비자나 L비자를 가지고 입국한 그룹이 주재원들이다. 지난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해 꾸준히 늘어난 주재원들 가운데 미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로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현지경험과 국제감각,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만 하더라도 주재원 사회는 동포사회보다 일단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동포들은 경제적으로 자리잡기 전이었고 주재원들은 월급생활 속에 때로 골프를 친다거나 다소 안정돼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정착이 덜 된 사람들 입장에선 주재원 사회를 좀 불편하게 바라보는 괴리현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한인사회가 정착되고 주재원 사화와의 격차가 좁혀지면서 요즘엔 구분 자체가 어려워진 양상이다. 지금은 오히려 한국사회의 정년이 단축되면서 주재원들의 안정감, 직장의 시큐리티가 떨어지는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뉴욕일원 주재원 출신의 동포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찾는다면 1973년 외환은행 과장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가 79년 선경그룹 미주본부장으로 뉴욕에 부임한 이래 22년만에 그룹 부회장으로 은퇴한 김영만을 꼽을 수 있다. 지난 2001년 SK그룹에서 은퇴했다지만 그의 요즘 일과는 전보다 더 바쁘다.
한인사회 경제가 커지면서 국제경제의 흐름을 잘 아는 그로부터 컨설팅을 받는 회사가 있어서 대개 월요일에 임한다. 화요일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노아은행에 나가 일을 보고 오후에는 그림 공부를 한다. 미술에 소질은 없었지만 골프 이후의 건강을 위해 2년 전부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요일은 새벽에 단전호흡을 하고 7시 반부터 포트리 경희한의원에서 유학강의를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시작한 이 강의는 요즘 논어를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참석한 지난 7월초 강의는 아침 출근길의 직장인 10여명이 공자님의 심오한 생활철학을 배우던 스터디 그룹이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때 불교 경전에도 깊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결혼 후 부인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공부도 했으니까 종교를 넘나드는 경지에 이른 셈이다. 10시부터 컨설팅을 가거나 골프 칠 일이 있으면 수요일 또는 목요일에 친다. 금요일 하루는 은행에 출근하면서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하거나 이후 자유시간을 갖는다. 토요일은 주로 골프, 1주일에 두번 정도 골프를 치게 된다. 일요일엔 교회에 나가고 가족과 함께 지낸다. 일정이 꽉 차있는 셈이다.
“지금은 구분이 거의 없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주재원 사회와 한인사회의 구분이 심했죠. 제가 볼 때 상호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주재원 사회가 한인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고 또 한인사회도 주재원들로 인해 도움이 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저와 비슷한 경우로 미국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코참 회장 출신의 석연호, 정홍택, 한국타이어의 김호경 회장 등과 가끔 만납니다. 만나서 옛날 얘기들을 하죠.”
주재원 사회의 조직인 코참(Korea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in The USA, Inc.)은 1992년 뉴욕에 창설된 한국 지상사들의 단체이다.
그 전신으로 뉴욕주재지사협의회가 있었지만 코참은 종합상사 위주의 보다 강력한 조직체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미국계 지상사들의 단체인 암참과 또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본계 지상사 단체를 벤치마킹하면서 출범했다. 코참의 특수한 역할로 매년 회원사들이 워싱턴을 방문, 미의회와 국무부, 상무부, 국토부, 무역대표부등을 찾아 한미간의 무역갈등 요인들을 실무차원에서 제거하는 로비성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 나타난 구체적인 성과가 한미 FTA였다. 민간 레벨인 코참의 실무역할이 컸음이 확인됐다.
코참 창설멤버인 김영만은 3대와 4대 회장(1997-2000)을 지내면서 특히 뉴욕한인사회와의 관계증진을 위해 노력한 회장으로 기록된다. 그의 임기 중 뉴욕한인회관이 모기지 체납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코참 회원사들이 15만달러의 성금을 전달해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고. 매년 코리안 퍼레이드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코참이 운영하고 있는 주재원 자녀들의 교육기관인 우리한국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10년간 남다른 열정을 쏟은 공로로 한국정부로 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지난 6월 코참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도 표창을 받았다.
경기고-서울상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1973년 외환은행 LA지점 과장으로 첫번째 입국, 3년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77년 1월부터 선경그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고속승진 한 케이스다. 부장 1년만에 이사 재무본부장이 됐고 79년에 미주본부장 발령으로 뉴욕으로 오게됐다.
미주법인 사장으로서 81년에 상무, 83년에 전무가 된 후 미국쪽 실적이 워낙 좋은 덕에 85년 부사장이 되고 95년에 본사 사장급으로 승진했다. 이때 최종현 회장으로 부터 해외업무에 관한 모든 재량권을 부여받아 미국뿐만 아니라 중남미를 포함하고 유럽까지 책임을 지는 명실상부한 해외사령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주재원 생활 통산 25년이 되는 2001년 은퇴했다.
그간 미정계 쪽에 쌓은 인맥으로 게리 애커맨 전 연방 하원의원과 가깝고 코리아 소사이어티 산파역을 하면서 가족같은 친분을 유지하게 된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가 있다. 서울대학교 뉴욕동창회장 임기를 최근에 마쳤고 가족으로는 AWCA 창립멤버로 이사장, 회장을 지낸 강윤희씨와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잉글리시와 저널리즘을 전공한 딸 소연은 맨하탄에서 뮤지컬 매니지먼트를, 아들 태훈은 비즈니스 스쿨을 마치고 컴퓨터 마케팅 회사 부사장으로 첨단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