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과 학위증서(사진 위)와 기념동판 앞에 선 관계자들, 왼쪽부터 이인수 교수, 정운찬 전 총리, 이기수 회장.
지난 3일 프린스턴대 공공 국제대학원 소강당 ‘이승만 홀’ 명명 기념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 프린스턴대에 그의 이름을 딴 소강당이 탄생했다. 학위 취득 102년만의 일이다. 지난 주 10월3일 프린스턴대 공공 국제대학원인 우드로 윌슨 스쿨내 소강당을 이승만 홀(Syngman Rhee 1910 Lecture Hall)로 명명하는 뜻깊은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세실리아 라우스 대학원장을 비롯하여 김종석 프린스턴대 한국동문회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이기수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사업회장, 이인수 명지대 명예교수(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 부부 등 관련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프린스턴대 한국 동문회는 지난 2010년 이승만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홀 건립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3년간의 모금활동을 펼친 끝에 이날 개관을 본 것이다. 김종석 동문회장(홍익대 교수)은 대학 선배인 이승만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모교인 프린스턴대에 그를 기념할만한 공간이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데 대해 아쉬움이 컸지만 이제 동문들이 추진했던 꿈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졌다며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이승만 홀은 뉴저지의 대표적인 아이비리그 명문이며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프린스턴대 로버트슨 홀 내 소강당에 기념동판을 부착함으로서 100년전 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사업의 본거지로 자리잡았다. 이승만 홀은 100명 정도를 수용하는 계단식 소강당이다. 학생들은 이 강당을 ‘보울(Bowl) 16’이라고 부른다. 사발 모양으로 안이 우묵하고 깊은 반구형 그릇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학교측은 동문회가 이승만 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모금해 전달한 48만달러를 ‘이승만 학술기금’으로 조성해 국제관계 및 공공정책에 관한 강연 및 학술대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할 계획이다.
이날 개관식이 끝나고 박사학위(78년) 출신 동문인 정운찬 전 총리의 ‘희망, 배려, 도전정신 :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제목의 강연이 오후 4시30분부터 6시까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강연에서 정운찬 동문은 “이승만 전대통령이 프린스턴대에서 얻은 국제적 안목과 지식은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밑걸음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같은 우방과 유엔과 같은 국제사회의 도움, 한국인들의 뜨거운 교육열, 그리고 할수 있다는 정신(can-do spirit)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로서 미국내 대학에 한국인의 기념물이 설치되기는 브라운대의 김구 도서관, 스탠퍼드대의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기념 세미나실에 이어 세번째가 된 셈이다.
1905년 조선의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도미길에 오른 이승만은 같은 해 2월 조지 워싱턴대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학사학위(1907년)를 받은 후 하버드대 석사(1908년)를 거쳐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우드로 윌슨(28대 대통령) 지도교수 겸 당시 총장으로부터 국제법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시기 그는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 학문에 몰두하면서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이승만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Korean Congress)를 끝내고 워싱턴으로 내려가 8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독립은 정치 외교를 통한 국제여론과 미국의 힘을 빌어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해방 될 때까지 꾸준히 펼쳐졌다. 때로 민존개조론을 기본으로 한 도산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과, 군사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독립노선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박용만의 암살(28년), 안창호의 사후(38년) 미국내 독립운동 노선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으로 일원화 되어 해방을 맞았다.
독립운동 기간 중 손에 흙을 묻히며 노동을 했던 안창호와 달리 독립공채를 모금하며 호의호식했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지만 양녕대군파 양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이승만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랬다는 주장도 한편에서 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국독립에의 열정, 효과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택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해방공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맞아 싸우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기틀을 세웠고 신생 공화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기도로 인해 4.19 학생혁명이 발생하자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 1965년 호놀룰루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파란만장한 여생을 마쳤다. 이후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국내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독립운동가, 건국 대통령 임에도 불구하고 집권 자유당 말기의 독재정치와 장기집권 기도 때문이다. 국정 최고지도자로서 그와같은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수는 없지만 일제치하 무국적자로서의 독립운동, 초대 대통령 시절의 폭넓은 국제외교, 한미 방위조약 체결을 통한 굳건한 한미동맹 수립 등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크다.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 민주의 가치를 지켰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기려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사업회는 뉴욕에도 지회가 설립되어 활동 중이다. 뉴욕지회장 손영구 목사는 지난 10월2일 총회에서 미주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내 이승만 기념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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