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대나무 밭에서 불면 대나무가 울지만, 바람이 지나지 않으면 대나무는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모처럼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채근담’ 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야금 연주 속에서 음이 끊긴 자리, 그 여운이 주는 잔향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북가주에서도 잘 알려진 나효신 작곡가의 국악 신곡 발표 콘서트에 참석한 자리였다. 콘서트의 주제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목어 앙상블’이다.
목어(木魚)란 나무를 깎은 잉어 모양의 법구(法具)가 아닌가. 어느 스님의 책에 목어를 만든 이유는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밤낮 눈을 감지 말고 깨어서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이란 기억이 난다.
이번 음악회에서 나효신 작곡가는 12현 전통 가야금과 25현 개량 가야금, 그리고 우리 가야금을 닮은 일본 전통악기 고토를 위한 곡들을 선보였다.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우리의 전통악기 가야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음악회 내내 청정한 가야금의 소리가 고향 대나무 밭의 바람소리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콘서트 이후, 나 작곡가의 스승이자 한국가야금의 명인인 황병기선생의 가야금 독주곡들을 여러 번 들어보았다. 그때마다 가야금에 대한 그의 간결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의 12현 전통가야금 소리는 농현(弄絃)이 생명입니다. 농현이란 손 떨림으로 음을 올리고 내리며 변화를 주는 기법이지요. 마치 붓글씨를 쓸 때 획의 변화와 같습니다.”
참 명쾌한 설명이다. 왼손으로 가야금의 현을 눌러 소리를 높일 때 누르는 손을 빠르게 떨고 힘을 달리하면 음이 미세하게 높아졌다 낮아졌다한다는 것이다. 현(絃)을 가지고 논다(弄)는 한자어가 흥미롭다.
12현 전통가야금에 농현이 강조되는 이유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선율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국악엔 화음이 없다. 올곧은 선(腺)의 음이다. 서양음악은 화음을 넣어 여백이 없이 꽉 채워져 있다. 그러나 국악은 여백이 크다. 그래야 선의 미가 산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선율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깊고 풍요로운 감동이 가슴에 전해져 오는 까닭이 여기 있는 듯 싶다.
깊은 떨림과 여운을 자아내는 농현의 중요한 비밀이 또 있다. 바로 연주자의 변화무쌍한 심리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다. 서양음악은 화성(和聲)을 통해 기쁘고 슬픈 정서를 비교적 다양하게 나타내지만 직선적인 가야금의 선율만으로는 수월치 않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체험을 통해서 안다. 우리 고유의 정서 한(恨)을 가야금 말고 어느 서양 악기가 더 생생하게 표현해 줄 수 있을까.
나효신 작곡가의 작품들과 황병기 선생의 ‘비단길’ 가야금 독주곡을 다시 들어본다.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빛 내리는 소리, 다람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여울물 흐르는 소리, 새벽까치가 짝을 찾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사슴이 물먹는 소리, 대나무 숲 사이로 지나는 바람소리, 그리고 산사에 목어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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