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세.입양인.미국학생들에 ...한국어 교육 한길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이선근 부부.
79년 브루클린한인교회서 한글학교 시작, 본격적인 한국어 전도사로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 한국어교육원 수강생 70%가 비한국계
언어로서 한국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알타이어를 연구하기 위해 터키로 유학했던 그의 꿈은 한국에 돌아가 대학교에서 후배 양성과 한국어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도에 본의 아니게 그 꿈을 접게 된 이선근은 미국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1979년 이래 뉴욕에서 한국학교 교장, 재미한국학교 동북부지역협의회장, 뉴욕한국어교육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한인 2세들에게 뿌리교육을 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또한 미국 대학 입시과목의 하나인 SAT II 한국어 모의고사 출제위원장으로 6년간 봉사한 외에 입양인 학교 운영, 최근에는 미국 고등학교에 정규 외국어 과목으로서 한국어반을 개설하는 ‘한국어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가 미국에서 갖게 된 새로운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그가 사무총장으로서 지난 2007년 활동을 개시한 한국어 추진위원회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고등학교와 인근 리지필드 고등학교에 한국어반을 정착시켰다. 교사를 양성해 추천하고 2년간 교사봉급을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2010년 시작된 팰리세이즈팍 고등학교 한국어반은 첫해 26명의 수강생이 다음해에 80명으로 늘어났고 3년째인 지난해에는 125명으로 증가해 현재 5개 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금년부터는 두 학교 지원에서 젖을 떼는 시기가 되었고 그간에 얻은 성과라면 럿거스대 교사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5명의 한국어 교사를 배출한 것과 캠페인 과정에서 한인사회와 한국정부로부터 20만 달러 가까운 모금이 이루어진 것. 부수적으로 한국정부에 미국 중고등학교 한국어 교육을 위한 담당과장 자리가 교과부에 신설된 것도 성과이다.
‘한국어 전도사’로서 일관된 그의 삶은 터키 국립 앙카라 대학교로부터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길에 뉴욕 처가를 방문하던 1975년 시작되었다. 신설된 외국어대 터키학과의 교수직 제의를 받았으나 말 못할 동료교수와의 대인관계 때문에 고민하던 그가 뉴욕에서 대학원 시절(연세대) 주임교수였던 박창해씨(당시 뉴욕한국일보 고문)를 만나 신상문제를 상의했다. 결과는 귀국을 미루고 여기서 연구를 하면서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때마침 사업을 하던 동서의 도움으로 용커스에 스니커샵을 시작하면서 그의 뉴욕생활이 펼쳐졌다.
그러나 몇 해 안가 “이건 아닌데”라는 회의가 들면서 그 회의를 달래기 위해 시작한 것이 교회 한글학교였다. 대학 3년 선배인 안중식 목사가 시무하던 브루클린한인교회에 한글학교를 79년도에 시작하면서 글자보다는 말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한국어 교육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전래동화 구연대회였고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 대회 수상자가 서울서 열린 구연대회에 출전하여 2등을 차지하는 실적도 나타났다.
뉴욕한인회 19대 조병창 회장(86-88년)의 권유로 문화 교육부장 및 이사로 참여하면서 한인회 주최 ‘어린이 예술제’를 성황리에 개최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예술제에 뉴욕일원 13개교가 참가했다. 그 무렵 창립을 본 재미한국학교 미동부지역협의회의 허병렬 회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협의회에 본격적인 참여와 함께 제2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임기 중 그가 한국학교 활성화에 기여한 공적은 뚜렷했다. 어린이 예술제에 이은 교사연수회, 첫 번째 연수회에 140여명이 참가하는 실적을 보였다. 또한 교사 사은의 밤, 동화구연대회 등을 정착시켰으며 이런 행사들은 지금도 연중행사로 계속되고 있다. 교사연수회를 위해 그간 미국 여러 도시에 강사로 나갔고 한국에서 개최된 국제한국어 학술대회에도 초청강사로 여러 차례 초빙되었다. 초창기 협의회를 이끌었던 멤버들은 허병렬, 김숙자, 김은희, 김송희, 그리고 이선근 부부 등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 내에서 자생한 한국학교들은 책도 없고 교실도 없는 불모지에서 힘겹게 운영되었다. 한국정부의 지원이 있기 전 동포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머니 아버지 삼촌 이모가 각기 선생이 되어 시작한 열성 교육이었다.
주말에 이선근은 브루클린한글학교 교장으로, 부인 김근순은 뉴욕한인경제인협회가 설립한 브로드웨이한국학교 교장으로 각기 일하는 한편 주중에 부부가 힘을 모아 맨하탄에 한국어교육원을 세운 것은 1995년이었다. 그동안 생활방편으로 운영해오던 스니커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성인들에게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을 시키겠다는 판단 아래 교실 3개, 사무실 하나를 갖춘 공간을 맨하탄 32가에 마련했다.
부부가 자력으로 운영하던 교육원은 8년 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몇 사람의 참여로 확대되면서 2003년 비영리단체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한국문화연구재단 명칭 아래 미 국세청 IRS에 502C로 정식 등록을 하고 재출발했다. 입양인 학교도 이때 재단 내에 설치되어 운영 중이며 현재 25명의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다. 8주 코스인 한국어교육원 전체의 수강자는 40명-50명을 오르내린다.
처음 시작할 때 75%가 한국계 2세, 25%가 비한국계였던 것이 지금은 반대로 70%가 비한국계이다. 당초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수강생들의 직업은 변호사가 제일 많고 금융계통도 많지만 요즘은 좀 뜸한 편이다. 다음으로 의사, 대학교수, 고등학교 교사들이며 그런 전문인들을 5명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광규 고문, 김영덕 회장, 이선근 사무총장으로 이어지는 한국어추진위원회를 더욱 활성화시켜 미국 내 고등학교에 한국어반을 연차적으로 늘려나가는 일이다. 지난해 한국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성사된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한국어 교육과가 2014년 9월학기에 신설된다. 이때 신입생이 졸업을 하게 되는 2018년 5월이면 정식으로 한국어 교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한다. 그간의 공백기에 필요한 교사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 추진위원회로서는 급선무다.
언제 어느 고등학교가 한국어반 신설을 요청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번처럼 자체 예산을 가지고 럿거스대 단기 교사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일이다.
대학시절 같은 분야의 전공으로 인연이 맺어진 부인 김근순 역시 브로드웨이한국학교 교장과 제8대 재미한국학교 동북부협의회장을 역임한 한국어 교육자로서 서로 의지가 되는 동반자이다. 슬하에 1남1녀. 딸 이승희는 부엌 브랜드로 유명한 ‘윌리엄 소노머’에 근무하고 있고 아들 이장원은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고 있다.
조종무 뉴저지고문/국사편찬위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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