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한국에서 6, 7,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밤을 새우던 기억이 새롭다. 역사가 흐르는 방향에 대한 감각과 발전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을 것 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에 항거하던 근로자, 학생,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한국역사의 한 분수령에 서 있다는 날카로운 자각이 있었던 듯하다.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국가를 이루는 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이라는 인식은, 박대통령의 신념이었던 조국의 산업화 선진화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세대들의 분투로 민주화가 마침내 이루어졌고, 이제는 평화롭게 정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인의 자부심을 갖는 것은 필자만은 아닐 것 이다. 그러나 혼란한 오늘의 한국의 정치상황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지혜로운 민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의 투쟁으로 이룩한 민주화가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문일까?
미국 여야의 대립도 전과 같지는 않지만, 대립의 핵심에는 국가의 빚을 어떻게 줄이고 경제를 어떤 정책으로 회복시킬 것이며 어떤 외교와 국방정책으로 미국의 이익과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지가 그 정책대립과 검증의 핵심이다. 그러나 극한적인 한국 여. 야의 대결 구도에는 대립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마치 조선시대의 타협 없는 당쟁을 연상케 한다. 상복을 며칠 입는 것이 옳고, 그르냐는 예송 문제로 당을 갈라 죽이고 죽던 당쟁의 역사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명분과 공허한 이념이 당파의 이익과 야합한 결과였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장관으로 제청된 사람들이 소위 ‘검증’에 실패하여 줄줄이 낙마하고, 북한의 어이없는 전쟁위협이 험악한데 국방장관이 아직도 공석이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려고 선거로 공약한 미래 창조과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재미 과학자 한 분은 조국에서 봉사하려던 꿈을 이유 같지 않은 시시한 정치적 이유로 버려야만 했다. 명분 없는 당파싸움의 추악한 결과였다.
민주국가에서 정부의 지도자로 지명된 사람들을 검증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무엇을 위해 왜 검증을 하는 것인지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지도력을 잘 갖춘 사람이 성인과 같은 인격자이거나 강태공 (姜太公)처럼 가난을 낙으로 시간을 기다렸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 일까? 그러나 역사상 성인만으로 구성된 정부가 있었다는 말을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 결점이 그 사람의 장점과 지도력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면,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큰 도(道)일 것 이다.
오늘 다시 한 번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역사에서 배운다는 의미는 오늘의 문제를 역사라는 어제의 거울에 비춰보고 미래로 나갈 바른 지혜를 얻으려함이 아닌가? 투쟁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명분 없는 투쟁으로 망하게 하려는가? 당리당략에 앞서 전쟁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지혜가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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